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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화폐의 역사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09.10.06 09:22 수정 2009.10.06 09:23

김윤희 지사초등학교 교사

ⓒ 성주신문
우리는 매일 경제 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며 이 때 화폐의 역할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의 변화모습을 알아보며 화폐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 봅시다.

·우리나라의 고대화폐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957년에 기자조선에서 자모전이 사용되었고, 기원전 109년에 마한에서 동전이 처음으로 주조되었으며, 동옥저에서는 금은무문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시대까지는 금속으로 만든 주화보다는 쌀과 베를 중심으로 한 물품화폐가 더 널리 쓰였다.

·삼국시대에는 물품화폐 사용
청동기 및 철기문화가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력이 향상되고 경제생활이 보다 윤택해지자 교환거래가 활발해졌다. 삼국시대에는 교환의 매개수단으로 곡물과 직물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고구려에서는 금속류, 신라는 금은 세공품의 유통이 활발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화폐의 유입
삼국시대에는 일찍부터 화폐제도가 발달한 중국으로부터 각종 주화가 들어왔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나라 각 지역에서 도전, 포화, 오수전 등 여러 가지 중국화폐가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고려
성종 15년(996년)에 건원중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로 된 주화가 만들어졌다. 원래 건원중보는 중국의 당 숙종 2년(759년)부터 주조된 엽전인데 고려에서는 중국 건원중보와 구별하기 위해 동전 뒷면에 우리나라 화폐임을 표시하는 ‘동국(東國)’자를 넣었다.

그러나 이러한 철전의 주조에도 불구하고 당시 민간에서는 쌀과 포가 교환수단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강력한 주화유통정책을 시행하였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목종 5년(1002년)에 철·포 겸용책이 채택되었다.

그 후 약 100여년 뒤인 숙종 2년(1097년)에는 화폐를 만들고 관리하는 주전관이 설치되고 4년 후에는 은병이 처음으로 발행되었으며 숙종 7년(1102년)에는 소액거래의 편의를 위하여 해동통보가 발행되었다. 한편 충렬왕 13년(1287년)에는 소액거래의 편의를 위하여 쪼개어 사용할 수 있는 쇄은이 유통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동전과 은병 등의 화폐는 상류층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을 뿐 여전히 쌀과 베 등의 물품화폐가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
조선왕조는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물품화폐 대신 명목화폐제도를 정착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태종 때에는 지폐형태인 저화가 발행되어 포화와 병용되었으며, 세종 5년(1423년)에는 조선시대 최초의 동전인 조선통보를 발행하고, 그 2년 후에는 저화 유통을 정지하고 조선통보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또한 세조 10년(1464년)에는 국가 비상시에 무기(화살촉)로 사용될 수 있는 전폐가 제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교환경제의 미발달과 화폐발행량의 불충분 등으로 이들 화폐가 일반적인 거래수단으로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에서는 교환경제와 더불어 화폐경제의 발달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숙종 4년(1678년)에는 우리나라 화폐 발전에 획기적인 계기가 되는 상평통보가 발행되었다. 상평통보는 우리나라 화폐 사상 전국적으로 유통된 최초의 화폐이며 고종 때까지 2세기에 걸쳐 주전소, 서예체, 천자문순, 수자순, 오행순 등으로 나누어져 약 3천여 종류가 발행됨으로써 우리나라에서 최장기간 통용된 화폐가 되었다.

상평통보의 전국적인 유통은 상공업의 발달을 촉진시키고 전통적으로 취약한 농업생산에 의존하고 있던 국가재정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기여하였다.
1866년 대원군은 경복궁을 새로 짓고 군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당백전을 발행하였는데 그 가치가 상평통보의 100배가 되었으므로 급격한 물가상승의 폐단을 초래하였다. 결국 당백전은 발행된 지 2년여 만에 통용이 중지되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재정수입을 충당하기 위해 1883년에는 당오전을 발행하였는데 당오전 역시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였다.

·개항기
한편 일본 등 외국의 개방 압력으로 1876년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후 19세기말까지는 멕시코 은화, 루블 은화, 일본화폐 등이 개항장을 중심으로 통용되었다. 이때 조선 정부는 상설 조폐기관인 전환국을 설립하고 은본위제도 등의 근대적인 화폐제도를 채택하면서 고유의 화폐 주권을 지키려고 하였다. 즉 근대화폐를 주조하기 위하여 경성전환국을 설립하였으며, 1888년(고종 25년)에는 이곳에서 일환 은화, 십문 적동화, 오문 적동화 등 3종의 근대화폐를 주조하였다.

또한 1891년(고종 28년)에는 은본위제도 도입을 위한 시도로서 ‘신식화폐조례’를 제정하여 본위화폐를 오량, 일량 은화로 정하고 오량 은화는 외국인 전용으로, 그리고 일량은 내국인의 거래에 사용토록 하였다.

20세기 초반에는 상평통보와 구리와 니켈로 만든 백동화가 주로 쓰였으며 정부가 발행한 은화, 일본의 은화 등도 함께 통용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일엔짜리 은화가 1901년(광무 5년) 화폐조례에 의하여 유통이 금지되자 일본의 제일은행은 1902년에 개항장에서의 무역거래를 위하여 일본에서 만든 일원, 오원, 십원 3종류의 지폐를 우리나라에서 발행하였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제일은행권 배척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 경제 수탈을 공식화하는 한일협정을 체결하고 1905년 일련의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에 따라 신 화폐는 일본화폐와 같은 것으로 하고 일본 조폐국에서만 제조토록 함으로써 일본 제일은행권이 통용되도록 하였다. 그 결과 1909년경에는 일본 제일은행권이 거의 전국적으로 통용되었다.

한편 1890년대부터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등 금융기관이 속속 설립됨에 따라 이를 통일적으로 규제할 중앙은행의 설립이 요청되었다. 이에 따라 1908년(융희 2년) 11월에 한국은행조례가 제정되고 그 이듬해에 구 한국은행(당시에는 한국은행이라 하였으나 현재의 한국은행과 구별하기 위하여 구 한국은행이라 함)이 설립되었다. 구 한국은행은 설립초기에는 제일은행권을 발행하였으며 그 이듬해에 구 한국은행권 일원, 1911년에 구 한국은행권 오원, 십원을 발행하였다.

·일제시대와 광복이후
구 한국은행은 일제가 강제로 국권을 침탈한 이듬해인 1911년 8월 조선은행으로 다시 출범하였다. 조선은행은 조선은행법에 따라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지만 그 은행권의 양식 및 종류에 관해서는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아야만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은행은 1914년 백원, 1915년 일원, 오원, 십원짜리 은행권을 일본에서 만들어 우리나라에서 발행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는 전비조달을 위해 은행권의 발행을 남발하는 등 우리나라에서의 경제적 수탈을 심화시켰다.

한편 1944년말까지 조선은행권은 대부분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서 제조되었으나 1945년 들어 전세악화로 일본의 해상보급로가 차단되자 일본은 대장성 기술자 4명을 파견하여 우리나라에서 은행권을 제조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의 조선서적주식회사(후에 조선서적인쇄주식회사로 통합)에서는 종래 십원권과 오원권의 원판을 변형하여 천원권을, 종래 백원권 원판과 모조지를 사용하여 ‘을’ 백원권을 제조하였다. 그러나 이때의 천원권은 심리적으로 인플레이션을 조장할 우려가 크다는 이유로 발행되지 못하였으며 백원권만 해방 직후에 발행되었다.

·한국은행 설립이후
1950년 6월 12일에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으로서 한국은행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조선은행권이 그대로 유통되는 상황에서 6.25전쟁이 발발하자 한국은행은 곧 전시체제로 전환하여 대전으로 이전하였는데 한국은행 본점을 점거한 북한군은 남한경제 교란을 목적으로 조선은행권을 남발하였다. 이에 따라 1950년 8월에는 조선은행권을 한국은행권으로 교환하는 제1차 통화조치를 실시하게 되었다. 한편 제1차 통화조치중인 이듬해 10월에는 한국조폐공사법이 발효되고 한국조폐공사가 설립되어 천원권을 제조하기 시작하였으며 1952년 ‘신’천원권과 오백원권을 제조, 조폐기관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53년 2월 제2차 통화조치의 실시로 화폐단위가 ‘원’에서 '환’으로 바뀌고 100원이 1환으로 교환되었다. 이때의 환 단위 은행권은 미국 연방 인쇄국(BEP)에서 제조된 것으로 광복 후 당시까지 발행된 어떤 은행권보다 품질이 뛰어난 고급종이가 사용되었다. 또한 형광물질을 넣어 자외선을 비추면 바탕이나 번호색상이 바뀌는 등 위·변조방지장치가 삽입되었다. 제2차 통화조치 이후 1958년까지 발행된 환 은행권은 9권종에 달하였는데 이중 오십환권 및 신 십환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을 앞면 도안으로 채택하였다.

1960년 8월에는 세종대왕으로 도안을 변경한 천환권이 발행된 데 이어 이듬해에 역시 세종대왕을 도안으로 한 오백환권이 발행되었다.
1990년대 들어서는 수입이 자유화된 컬러복사기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은행권의 위조 위험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부분노출은선(일부만 드러나 보이는 은색선), 미세문자, 요판(凹版)잠상(볼록 인쇄된 숨은 숫자), 광간섭무늬(동그란 나선형 무늬), 보는 각도에 따라 색상이 변하는 시변각잉크(OVI, Optically Variable Ink) 등 위·변조 방지장치를 권종별로 보강하였다.

2002년부터 화폐제도 개선에 대한 연구ㆍ논의가 이루어지다가 2005년초 정교한 5천원권 위조지폐가 대량 발견됨에 따라 현재의 은행권 3종을 모두 새로 발행하여 위조를 방지하고 화폐품질을 개선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2006년 1월 새 5천원권이, 2007년 1월 새 1만원권과 1천원권이 각각 발행되었다.

만원권이 처음 발행된 1973년 이후 우리나라의 물가와 국민소득은 크게 상승하였으나 최고액면금액은 만원으로 유지됨에 따라 많은 장수의 은행권을 휴대하거나 수표를 발행해야 하는 등 불편함을 겪게 되었다.

이에 우리 경제상황과 조화를 이루도록 최고액면금액을 조정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논의를 바탕으로 한국은행은 2009년 6월 23일 오만원권을 발행하였다. 오만원권의 초상인물은 신사임당이며 보조소재로는 묵포도도, 초충도수병 중 가지 그림, 월매도, 풍죽도 등이 사용되었다. 오만원권의 위조방지장치로는 띠형 홀로그램, 입체형 부분노출은선 등이 있으며 오만원권의 뒷면은 다른 권종과 달리 세로 방향으로 디자인되어 있어 도장 소재인 월매도와 풍죽도를 표현하는데 적합할뿐더러 시각적인 권종 구분에도 유리하다.

1950.6.12 한국은행 설립
1950.6.25 6.25전쟁 발발
1950.7.22 최초의 한국은행권 2종(1,000원, 100원)발행
1950.8.28 제1차 통화개혁, 조선은행 백원권을 한국은행권으로 1:1 교환조치 1951.10.2 한국조폐공사 설립 1953.2.15 제2차 통화개혁, 화폐단위 변경(원(圓)->환())및 100원을 1환으로 조정 1959.10.20 한국은행 최초의 주화 2종(50환, 10환)발행
1959.10.30 100환(주화) 발행 1962.6.10 제3차 통화개혁, 화폐단위 변경(환->원)및 10환을 1원으로 조정 1966.8.16 "원"표시 주화 3종(가10원, 가5원, 가1원)발행
1970.8.15 대한민국 반만년역사 기념주화 발행 1972.7.1 가 5,000원권 발행
1972.12.1 가 50원(주화) 발행 1973.6.12 가 10,000원권 발행 1975.8.14 가 1,000원권 발행, 광복 30주년 기념 주화 발행 1979.6.15 나 10,000원권 발행 1982.6.12 500원(주화) 발행 1983.1.15 현재 사용주화 발행(나 100원, 나 50원, 다 10원, 다 5원, 다 1원)
1983.6.11 다 5,000원권, 나 1,000원권 발행
1983.10.8 다 10,000원권 발행 1994.1.20 라 10,000원권 발행 2000.6.19 마 10,000원권 발행 2002.6.12 라 5,000원권 발행 2006.1.2 마 5,000원권 발행
2006.12.18 라 10원 주화 발행 2007.1.22 바 10,000원권, 다 1,000원권 발행 2009.6.23 50,000원권 발행



자료 출처 : 어린이경제마을(http://kids.bokeducatio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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