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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 태 영 경희대 명예교수 |
ⓒ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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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사립대학보다는 지방의 공립 전문학교가 대우도 낫고 신분보장도 확실할 뿐 아니라 이 학교도 곧 대학으로 승격하게 될테니 그냥 함께 지내자고 하는 동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녀 교육 때문에 서울로 왔다. 여자초급대학 교양영어를 맡았다. 대학에서 1주일 4시간 배정의 교재를 1주일 2시간만 배정된 초급대학에서 다 가르치기는 불가능해서 여자초급대학 학생들을 위해 교양영어 자습서를 펴냈다. 그 자습서가 대학 학생들 손으로 흘러 들어가 그것 때문에 대학 교양영어 강의에 지장이 많다는 이유로 문제를 삼아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시말서를 썼다.
그 해 추석 때 받은 봉급 봉투에 '시말서를 쓴 자는 상여금 100% 제외'라고 되어 있었다. 보너스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며칠 후 등기 우편물을 하나 받았는데 고등학교 재직시에 가르친 제자가 보낸 것이다. "… 이번 달에 추석 상여금을 받았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도와주시지 않으셨다면 오늘날 이렇게 자랑스러운 교사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 선생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적은 뜻이오니 기꺼이 받아주옵소서…"
그 다음 학기에 선행 사례기를 한 편씩 써내라는 회람을 받고 '추석 보너스'라는 제목으로 지난 해 추석 때 겪었던 보너스에 관한 이야기를 멋모르고 써 냈다. 교양영어 자습서를 펴냈다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시말서를 쓰고, 그 일 때문에 추석 보너스를 받지 못한 일, 보너스를 기다리고 있는 아내를 생각하며 쩔쩔매고 있는데, 고등학교 재직시에 좀 도와준 일이 있었던 학생이 교사가 되어 추석 보너스를 탄 돈을 보내주어 궁지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수기 형식으로 써 냈다.
이번에는 또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추석 보너스' 수기가 '밝은사회' 제9호에 실렸다. '밝은사회운동'은 이 대학 총장이 벌이고 있는 세계적인 운동이라, 그 기관지인 '밝은사회'는 국내는 물론 전세계 방방곡곡에 배포되고 있었다. 그런데 '추석 보너스'가 거기에 실리기에는 부적절한 내용이라고 해서 총장이 크게 화를 내어 편집부는 황급히 배포된 책자를 수거해서 그 페이지를 다른 기사로 대체시켜 재발행하는 야단이 일어났다. 드디어 불똥이 내게로 튀었다. 학교에 대한 '불평분자', '해교행위자'로 낙인찍어 사표를 내라는 아첨꾼들의 압력이 가해졌다. 멍청한 촌놈, 어처구니없이 사표를 썼다. 강의 중지 지시가 내렸다. 신분보장이 확실한 지방의 공립 전문학교에 그냥 있으라고 만류하던 동료들의 말이 가슴을 저몄다. 너무나 억울했다. 죽음으로 항변하고픈 충동이 왈칵 일어났다. 어떻게? 투신? 5층 연구실 창문이 활짝 열려있다. …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 루소가 속삭였다. "나도 몇 번이나 연못에 투신하려고 한 적이 있었네. 그러나 그때마다 연못물이 너무 차가워서…" 톨스토이가 달래었다. "하나님은 진실을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God sees the truth, but waits.)"
연구실에서 성경만 읽고 있는데, 1주일이 지나서야 사표 반려도 없이 슬그머니 강의를 해도 된다는 통고를 받았다. 그러나 '총장의 눈 밖에 난 자'로 찍혀, 다른 사람은 조교수 4년이면 다 부교수가 되는데, 7년이 넘어도 마냥 조교수다. 이 길은 내가 갈 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서울장로회신학교 야간부 3학년에 편입해서 2년간, 총신대학 석사 과정 2년을 주경야독해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만년조교수냐, 가보지 못한 목회의 길이냐의 갈림길에 서있던 학년 말에 총장이 불렀다. 오랜만이라고 하면서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 동안 배 교수를 한번도 부르지 않았던 것은 내가 잊고 있어서가 아니라, 좀 거리를 두고 지켜보기 위해서였소. 하도 배 교수를 두고 말이 많기에 시간이 좀 걸린 거요. … 국제캠퍼스 외국어대학으로 발령을 내겠으니, 거기 가거든 이제 소신껏 일하도록 하시오. 내가 도와줄테니."
곧 교수로 승진되고, 영문학과 학과장, 외국어대학장을 거쳐 부총장의 보직을 맡고 정년퇴임을 했다. 그리고 또 한학기를 더 부총장의 직무를 수행했다. 전례 없는 일이다. 내가 그때 죽지 않고 지금 이런 얘기를 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
우리나라는 세계 10위권 경제 강국이지만 하루 평균 36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한다. 2003년 이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자살 1위라는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자살은 전통적으로 죽음을 통해 자신의 분함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저마다 사연이 있겠지만 어떤 명분으로도 자살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생명의 존엄성은 절대 가치이다. 생명의 주권은 인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절대자에게만 있는 것. 자살은 살인이다. 자살은 고통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생애의 업(業)에다가 자살 순간의 진심(嗔心)까지 더해져 다음 생의 고(苦)는 지금보다 더해진다고 불교에서는 말한다. 어떠한 원통함이나 억울함이 있어도 자살만은 피하자. 그리고 기다려보자. "하나님은 진실을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201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