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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군중 속에서 고독을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8.03.07 10:09 수정 2018.03.07 10:09

↑↑ 최 필 동
수필가
ⓒ 성주신문


 
호주 살던 사위·딸들이 7년 만에 동시에 휴가를 받아 집에 왔다. 내 가솔을 다 모으니 10여 명이었고 의미 없이 보낼 수 없어 나름으로 계획도 세우니 마음도 동심으로 돌아가는지 가볍게 들뜨기도 했다.
 
참으로 오랜만이니 처음 하루 이틀은 모두 맘껏 웃고 못다한 얘기를 쉼 없이 하느라 즐거운 날의 연속이었다. 화기애애는 이럴 때나 쓰는 말인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화기애애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50을 바라보는 사위·딸들이니 처음 만났을 때와 같진 않겠지만 내 얘기에 마지못해 듣는 시늉만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저네들 나고 자란 얘기하고 간간이 유머를 섞으면 자연스레 폭소를 터뜨리기도 했던 애들이 이젠 무덤덤, 듣는 척만 했다. 어떤 땐 나 혼자 몇 마디 하다 멋쩍어 그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제 에미보다 나를 더 좋아하던 손자들이었지만 중고생이 돼 버렸으니 더 말할 것이 없었다. 하긴 그게 더 자연스러웠는지 모를 일이었다.
 
엄부자모라는 지난 시대의 고릿적 얘기로는 변화하는 세태의 자식들에게 먹힐 리가 없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기성 코미디언에 버금가는 위트가 아니면 반응이 신통찮으리라는 것도 알았다. 뿐만 아니라 중년이 되어 만났으니 세대 간의 간극이 너무 커 자연 소외될 수밖에 없음도 알았다.
 
물론 노래자(老萊子)의 반의지희(班衣之戱·옛날 중국의 노래자가 일흔이 넘어 노부모 앞에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췄다는 고사에서 나온 고사성어) 같은 고전적 효심은 기대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내 어머니 계실 때가 생각났다. 당시 내가 50대일 때이니 꼭 지금의 자식들과 같았다. 잡다한 가정사나 내 먹고 사는 문제를 아내와 얘기하다 보면 듣고 있던 어머니가 걱정을 한다. 실제로 어머니는 몰라도 되고 또 괜한 걱정을 마시라는 뜻으로 '어머니는 몰라도 돼요' 했다가 호된 홍역을 치뤘다. '오냐!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하며 평소 듣지도 못했던 불같은 역정을 내시는 것이었다. 정말 온유하신 어머니의 성품에서 전에 없던, 처음 듣는 격정을 보는 순간이었다.
 
그게 얼마나 서운했는지 그날 한 끼 식음을 폐하고 대화는커녕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어머니께 난생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죄송하다 했지만 그 다음 날에야 화를 푸시는 것이었다.
 
사실 옛날 같이 일상사가 단순했을 땐 구태여 소통이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변화된 오늘의 세태에서는 부모자식 간도 소통이 필요한데, 의도적은 아니겠지만 뭔가 소외를 당하는 듯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물론 나 같은 노년에겐 사회적 일반상식도, 식견도 모자랄 것이니 자기(자식)들의 화제에 끼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고매한 식견이라도 가졌으면 모를까.
 
특히나 정치판 얘기했다가 세대적 차이로 극과 극을 오락가락 하게 되고, 집에서 쓰는 특정 기업 가전제품에까지 비토를 거니 더 이상 정치와 시국 얘기는 안 하기로 약정(?)을 맺는 해프닝도 벌였다. 현 시국의 축소판을 보는 것 같아 '판도라의 상자'가 됐지만 어쩐지 씁쓰레하기도 했다.
 
애들이 스케줄을 짜놓은 제주도 여행을 갔다. 좀 걸어야 할 땐 두 늙은이가 애들 걸음을 따라 갈 수가 없어 자연 뒤처지기 일쑤였다. 그럴 땐 내가 아내를 보고 '빨리 따라붙어!, 우릴 떨어뜨릴지도 모르니까···'. 실제로 관광 갔다 노부모 유기하는 경우를 봤으니 그걸 빗대어 패러디를 했으나 애들은 그냥 지나가는 얘기 정도로 듣는 듯했다.
 
또 생태가 평탄치 않는 주상절리(柱狀節理)는 젊은이들만 가는 코스여서 '여기 가만히 쉬고 계세요···' 하고는 애들만 갔다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돌아오는 애들을 보고, '휴~! 이제 안심했다. 우리 떨어뜨리는 줄 알고 혼났네···'라고 해도 그냥 내 기대했던 만큼 폭소(?)는 없었다.
 
셋째아이인가는 초교도 입학 전 어느 날 내가 목욕 갔다 와서 등이 따갑다고 했더니 '아! 아줌마가 너무 세게 밀어줬어?'라 했고, 둘째는 '우리 아빠는 농담도 잘해'라고 했던 애들도 이제는 무덤덤이었다.
 
시대도 세태도 바뀌는데, 애들도 중년이 되어 사고도 성숙해 가는데 '품안의 자식'의 개념은 아니지만 그래도 애들 화제 속에 끼지도 못하여 뭔가 허전하고 소외감 같은 것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애들 나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즐거울 것이라 잔뜩 기대했다 틀어져버렸으니 모두 모여 가본 관광이 '군중 속에서의 고독'이라 하듯 한때이나마 외로움을 느껴 그 소회를 적어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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