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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新남녀칠세부동석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8.03.27 09:50 수정 2018.03.27 09:50

↑↑ 최 필 동
수필가
ⓒ 성주신문


미국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여배우 캐스팅 빌미로 성폭력이 드러났다. 그 여파는 이미 발표된 최영미의 시 '괴물'이 미투 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지금은 더욱 가열찬 해일이 되고 있다.

처음 미투라 해서 우리 신발의 고전 '미투리'의 옛말인줄 알았다. 첫줄도 읽기 전에 내 순진함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가 '노벨상'일 때마다 세계인의 시선을 받는 '노털상 후보 En···'이었기 때문이다. 또 무한 권력 앞에선 소신도 뭣도 없이 따리들만 득실대는 현실에서 그나마도 소신 발언을 하여 차기 권력 1순위였던 그도 미투 폭풍에 휩싸였다니 어쩌면 그리도 가면과 민낯이 다른가.

모두 충격이었다. 아니다. 충격으로는 미급이다. 경악, 경천동지도 모자란 파천황(破天荒)···? 화려했던 한 인간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한 순간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폭로가 이어지니 참 서글픈 점입가경이다. 문인단체만이 아니었다.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있었다. 미투를 찾기보다 차라리 '나는 아니다(I'm not)'를 찾는 게 쉬울 정도였다. '외눈박이 토끼 세상에 성한 눈 가진 토끼'가 뭐 어떻다더니 꼭 그 꼴이었다.

세상이 이렇듯 거짓투성이고 위선으로 포장된 줄 미처 몰랐다. 존경할 인물? 지성인? 거장···? 그 무엇도 이렇게 허구에 찬 지칭이었다니 황당하다. 너무 속았다. 배반감에 분하기도 하다. 가증스럽고 역겨운 그들에게 열렬히 보냈던 환호가 가련하다.

그 파렴치한 가식과 위선에 놀아난 선민(鮮民)도 가련하다. 이른바 선민(選民)이 선민(鮮民)을 이렇게 우롱할 줄 몰랐다. 능글맞고, 교활하고, 鮮民의 가면을 쓴 위선자들이 국민의 환호도 받고 존경도 받으며 이 나라 요소요소를 점령하고 있었다니 모골이 송연하다. 공황이 따로 없다.

음험한 늑대들, 교활한 여우들이 득시글대는 이 나라, 하다하다 인간의 허물을 가장 많이 덮어 주고 만인을 구제해야 할 성직자에까지···! 정의 구현에, 또 인권에 그리도 소리소리 지르더니, 그게 다 양의 탈을 쓴 늑대의 소리였다니 참 할 말이 없다.

한결같이 음모론과 법적 대응을 들먹이고, 궁색한 변명으로 소나기를 피하려다 백기 투항하는 역겨운 인간이 있는가 하면 해외로 잠적하는 소인배, 집 중 포화를 당했지만 아직도 '최고권부'의 미몽에서 헤어나지 못하는지 인터뷰도 하고 자청 불구덩이(검찰)에 들기도 하는 가증무비(可憎無比)의 작태도 보였다.

아직도 사안의 중대성을 모르는 듯하여 측은지심이 일기도 한다. 단 한마디, '오늘 이후 안ㅇㅇ은 숨만 쉬는 곳, 연옥으로 간다' 하면 끝날 것을 무슨 구차하게 회견까지···. 게다가 극단적 선택도 있으니···. 비극이다.

갑질 추행에다 이른바 '문화 권력자'의 추행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그 성역(문단 등단)에 들어야 하는 문학 신인들에게 기성 작가들은 '하늘'인데 누가 감히 그 음험한 손길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아마도 구조적이고 도제적(徒弟的) 후진 양성에서 오는 폐해임이 분명하다. 숙명적(?) 생사여탈권이 그 악마의 손 안에 있는데···, 더구나 이를 옹호하며 공공연히 흘리는 'with you'도 있는데 이는 또 어찌해야 하나?

인간은 무한 욕망으로 사는 동물인가? 그래서 재물, 색사(色事), 음식, 명예, 수면을 기본 욕망인 오욕(五欲)이라 하는가 보다. 하지만 다른 욕망은 무한대일진 몰라도 색사만은 경계(警戒), 극기, 절제의 세 금기가 절대로 필요한 욕망이어야 한다. 식욕과 색욕이 같다는 음담패설 수준의 가설항담도 있지만 이는 '막장언어'일 뿐이다. 이 문명화된 세상에 그 세 금기를 모르니 사달이 나는 게 아닌가 하는, 내 식견의 일단을 피력해 보는 것이다.

조선시대 풍류객들은 먼저 술이고 다음이 기생이었다. 그래서 장진주사(將進酒辭)도 나오지 않았는가. 지금이, 아직도 인권은커녕 이름 두 자도 쓸 수 없었던 시대의 '여자라는 원죄(남존여비)'가 있는 줄 알고 그런 저급한 쾌락의 대상으로만 삼는지 참으로 한심하다. 한심하다 못해 기가 막힌다.

내 20대 초반일 때 본 영화 '황진이'가 생각난다. 한다하는 벼슬아치나 풍류객들은 황진의의 가무·서화와 미모에 녹아 정분을 쌓고자 했으나 모두 차버린다. 당시 성리학의 대가인 화담 서경덕은 거꾸로 황진이의 정분의 대상이어서 구애를 했지만 여지없이 배척을 당했다.

그 영화 장면이 지금도 선연하다. 작심하고 유혹하려 비를 흠뻑 맞고 서경덕을 찾았다. '아이 추워···' 하니까, '그럼 내 옆에 누워 몸을 좀 녹이렴···' 했다. 서경덕이 누운 이부자리로 파고 들어가 교태를 부려도 '어허! 그냥 자라니까···!' 하는 것이었다.

오늘의 이 잡다한 세상에 그런 세상의 번뇌(욕정)를 초탈한 성인은 없다. 시대사적으로 있을 필요도 없는, 끝없는 가치관 변전의 시대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인간사의 최선의 가치인 인륜(윤리도덕)이 무한 욕망 앞에 사멸이 돼버렸는지도 모른다. 무한대의 문명이 발달하면 그에 따른 인륜도 그 못지않게 엄정·엄수해야 하는데,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오늘의 이 사태를 보며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악행이 횡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말 우려스럽다. 거기다 '新남녀칠세부동석'의 신조어가 생겨날 것이라고 시니컬한 푸념을 늘어놓는가 하면 펜스 룰(여성과는 식사도 않는다는 미국 부통령 마이클 펜스의 이름을 딴), 남성혐오, 신페미니즘이 회자되는 현실이 조금은 서글프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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