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군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산, 수많은 명현거유를 배출한 유림의 본고장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는 곧 타 지역과 차별화 할 수 있는 우리 지역만의 특화된 강점이자 경쟁력으로 육성 발전할 수 있는 근간이 된다. 이에 지역 소재 문화유산에 대한 소개 및 역사적 배경을 보도함으로써 지역민들로 하여금 자긍심 및 애향심을 제고할 수 있도록 선도하고, 아울러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한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개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1회 법수사지삼층석탑
▷2회 성주향교 대성전
▷3회 선석사 영산회괘불탱
▷4회 성주향교 대성전
▶5회 명주짜기
▷6회 금봉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
▷7회 회연서원 및 한강정구신도비
▷8회 심산 김창숙 생가
▷9회 성산동고분군
▷10회 도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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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 전통베짜기 기능보유자 故조옥이 선생의 명주짜는 모습. |
ⓒ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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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면 두리실 마을에 거주하던 故조옥이 선생은 1988년 4월 1일 국가무형문화재 제87호 명주짜기 기능보유자로 인정됐다.
조옥이 선생은 사랑채인 구연당에서 이곳을 찾는 학생 및 방문객들에게 명주짜기를 시연하면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2006년 명예보유자로 인정됐다. 2007년 노환으로 별세한 후에는 현재 조옥이 선생의 뒤를 이어 막내 동서인 이규종 선생이 전수교육조교로 활동하고 있다.
명주짜기를 전승하고 있는 두리실 마을은 500여년의 전통을 지닌 유서 깊은 안동권씨의 집성마을로 입향조인 권유검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일이 여의치 않자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의 질녀인 그의 부인 민씨와 함께 이 마을에 입향해 은거한 이후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거주하고 있다.
두리실 마을에는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87호인 명주짜기와 함께 도지정 무형문화재 제16호인 무명짜기, 안동권씨 입향조인 권유검을 추모하는 영모재 등이 있다.
조옥이 선생은 열아홉살에 안동권씨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안동권씨 집안은 대대로 여자들에게 밭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여자들은 집안에서 주로 길쌈을 하며 시간을 보냄으로써 안동권씨 집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름난 길쌈꾼들이 많이 나왔다.
조옥이 선생의 시어머니 홍남이 선생, 큰 동서 강석경 선생도 전승공예대전에서 솜씨를 자랑하던 베짜기 장인이었다. 또한 조옥이 선생의 넷째 동서 백문기 선생도 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16호 무명짜기 기능보유자이며, 다섯째 동서인 이규종 선생도 조옥이 선생의 뒤를 잇는 명주짜기 전수교육조교로 각자 베틀 인생을 살고 있다.
열아홉살에 시집을 간 조옥이 선생은 이듬해 젖먹이 딸 하나를 둔 상태에서 남편과 생이별을 했다. 남편이 일본으로 돈을 벌러 떠난 후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여러해 지난 후 남편은 만주 등지를 떠돌다가 전염병으로 객사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조옥이 선생의 명주짜기는 길쌈을 낙으로 삼고 이제나 저제나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며 한숨짓던 평생의 업이었다. 남편도 없는 시집에서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집안 살림을 돌보고, 밤낮으로 베를 짜는 일뿐이었다.
길쌈으로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는 정성들여 만든 명주를 파는 일도 베짜기 못지않게 중요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새벽같이 봇짐을 이고 장터로 향했다.
두리실 마을회관 관계자는 "명주 한필은 40자, 즉 21.6m 정도인데, 조옥이 선생의 베짜는 솜씨는 소문이 자자해서 동네에서는 물론 장날에도 선생이 짠 명주를 서로 탐을 내 웃돈을 주고 사거나 주문을 하는 일이 많았다고 전해진다"고 설명했다.
한편,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이다. 일반적으로 견사로 만든 견직물은 '비단'이라고 하지만 견사 종류와 세직 및 무늬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양잠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고조선 때부터 나타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전국 각지의 가정에서 베틀로 명주를 짜 자급자족했는데, 조선 후기 이후 개량식 직기로 대량 제직함에 따라 재래식 명주짜기는 급격히 쇠퇴하게 됐다. 최근에는 화려한 견직물에 밀려 명주의 수요가 줄어들어 간신히 그 명맥만을 이어오고 있다.
취재1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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