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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칼럼

망망대해를 너 혼자!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8.05.25 09:46 수정 2018.05.25 09:46

ⓒ 성주신문
 
오늘을 일러 혼밥족, 혼포족, 딩크족 등의 시대라 한다. 이로 인한 인구 감소, 1인가구 등 가족 구성의 변화, 특히 청년들의 취업 전쟁은 고시원의 '1인생활'을 부르면서 사회의 한 풍조가 됐다. 이는 유기적이고 복합적인 오늘의 사회현상이 다양다원화로 나타나게 되어 한마디로 그 원인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는 내 소견이다.
 
오늘의 이 풍요로운 사회, 그 이면에는 이런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있었고 그 결실을 맺으면서 그로 인한 반대급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 수준으로 말한다면 '먹을거리'만 해결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지난날의 농경사회에서 노동력 하나만으로 살아가다 불도저가 나와 삽질이 무의미해 지듯이, 이 사회에도 그만큼의 큰 변화와 변전이 왔고 지금도 이런 추세로 빠르게 가고 있다. 이 와중에 살아가는 방법도 변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래서 욜로족, 혼포족, 졸혼족 같은 풍조도 나오는 게 아닌가 한다.
 
그런데, 사실은 내 집에도 두어 달 전 외국에 사는 애들 셋이 왔다 갔는데 그 중에 유감스럽게도 이런 '···족'이 있으니 이를 어쩌나?
 
어느 날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애들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특히 백일과 돌 사진, 그리고 그 즈음에 찍은 한 장의 앙증맞은 사진에 내가 빠지는 순간이었다. 반어법 '고놈'을 써가며 뉘집 앤줄 모르지만 참 잘 생겼다, 예쁘다, 요놈이 커서 뭣이 될까···? 순진에 무구까지 온갖 미사여구를 들이대도 아깝지 않던 한 애를 본 것이다. 또 다른 한 장에는 제 언니와 싸워 샐쭉, 눈 흘길 때의 그 귀염은 섣불리 뭐라 표현하는 것보다 그냥 '배꼽을···' 밖에 없었다. 어디 전시회에 출품해도 가작 정도는···?
 
그랬는데 금방 마음의 동요가 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지었던 미소가 어느새 무거운 음울로 변하고 마는 것이었다. 거기다 결혼, 까짓것 안 해도 산다며 떳떳이 속내를 털어놨다고 제 엄마가 내게 들려 준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애 초교 입학 전 네다섯 살이나 됐을 때를 떠올리면 가슴이 더 아려온다. 그림책을 보면서 저 아는 것 뽐내듯이 할머니에게 '키스'를 따라 읽으라 했다. '츈향뎐'도 읽었던 할머니지만 영어발음은 제대로 할 수 없어 '키슈'라 하니, 아이고 할머니, 그것도 못하면서 장래 커서 뭐 될래···!라 소리쳤다. 이 호통(?)을 당한 할머니의 폭소는 거의 천둥 수준이었다. 그 폭소 두고두고 회자됐던 것은 물론이다.
 
그 애 초교 졸업 우등상 발표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최ㅇㅇ! 하니 애가 기대도 안한 호명에 놀라 뜨악했던 기억이 있다. 나도 제 엄마도 몰랐던 상이니 공부도 좀 하겠구나! 하고 순정한 기대를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랬던 앤데 4, 5년 전만 해도 '결혼해야지'라고 하면, '내 인생 내가 사는데 걱정 말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말은 그렇게 해도 때 되면 하겠지' 하며 내 속으론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그런데 이젠 '혼'자도 꺼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취업·결혼'이 금기어가 된지 오래이니까 말이다.
 
그게 음울을 넘어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것이었다. '포기···' 전만 해도 말은 그렇게 해도 딴은 무슨 계획이 있겠지···, 설마··· 했지만 (본인이 그랬을 지도 모를) 이젠 이리 되고 보니 그나마의 희망도 가질 수 없게 되는 현실이 너무 가혹하다. 혼밥에다 혼포까지 나오는 오늘의 이 문명사회가 무색하여 시대 풍조로만 치부하기엔 그 대가가 너무 혹독하다 생각했다.
 
취업도 못하는데 웬 결혼···? 결혼은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주택, 육아는 또 어째야 하느냐. 모두 어려워 혼포가 나온다고 생각하니, 거기 내 애도 포함해야 한다니 정말 아찔하다.
 
내 한 지인은, 아들 하나가 아들딸 낳고 살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가출을 했다는 것이다. 평소 종교적 성향을 보였으니 물어물어 산사를 찾고 아들도 찾았다. 내가 그랬다. 제 좋아 입산수도하겠다는데 왜 그걸 막느냐고 했더니,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온갖 희로애락도 겪고 사람 사는 맛도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는 희로애락 중엔 정염(情炎)이 빠지지 않았고, 부모가 생각하는 자식들의 삶의 선택은 '세속적 삶'이 전부라고 말하는 그에게 나도 솔직히 거기 편승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이다.
 
네 살 전후 천진스레 제 할머니 훈계(?)하던 총명아였는데, 초교 때 우등상도 받았는데 시운이 불리하여 시집도 가지 못하다니 그게 한없이 애연함으로 다가옴을 어쩌지 못한다.
 
나름으로 생활력은 있지만 망망대해, 거친 세파를 혼자서도 헤쳐 갈 강기는 좀 부족한, 여리디 여린 심성의 내 아이가 인생 고해를 함께 뚫고 갈 반려자도 없이 삶을 혼자 꾸려가야 할 것을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외향적 '리더'이기보다는 전형적 내조형이니 더욱 그렇다.
 
모든 선남선녀가 혼밥족이 돼도 내 애 만큼은 제발 시집갔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은 있다. 아이러니지만 이건 분명 '이기주의적 발상'만은 결코 아니라는 데에 더 큰 고민이 있다. 다만 한 가지, 그대로라도 수년째 외국생활 하는 것으로 보아 내 걱정이 기우는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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