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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소재 문화재로 문화관광 콘텐츠를 더하다 -8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8.06.29 13:00 수정 2018.06.29 01:00

8회 경상북도 기념물 제83호 심산 김창숙 생가

성주군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산, 수많은 명현거유를 배출한 유림의 본고장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는 곧 타 지역과 차별화 할 수 있는 우리 지역만의 특화된 강점이자 경쟁력으로 육성 발전할 수 있는 근간이 된다. 이에 지역 소재 문화유산에 대한 소개 및 역사적 배경을 보도함으로써 지역민들로 하여금 자긍심 및 애향심을 제고할 수 있도록 선도하고, 아울러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한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개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1회 법수사지삼층석탑
▷2회 성주향교 대성전
▷3회 선석사 영산회괘불탱
▷4회 성주향교 대성전
▷5회 명주짜기
▷6회 금봉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
▷7회 회연서원 및 한강정구신도비
▶8회 심산 김창숙 생가
▷9회 성산동고분군
▷10회 도산서당


↑↑ 대가면에 위치한 도지정 기념물 제83호 심산 김창숙 생가
ⓒ 성주신문



대가면 칠봉리에 위치한 심산 김창숙 생가는 1991년 5월 14일 도지정 기념물 제83호로 지정됐다.

이 가옥은 독립운동과 교육 진흥에 일생을 바친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이 출생한 생가인데, 그가 22세 되던 해(고종38년, 1901)에 화재를 당해 그해 다시 지은 건물이다. 따라서 화재 이전의 건물은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선조 대대로 살아온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생가는 청천서당(한강 정구가 동강 김우옹을 위해 건립한 서원)에서 약 100m 거리에 위치해 있다. 장방형 토석담 안에는 1991년에 건립한 사랑채가 전면에 따로 있고, 뒷담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면적은 1천94㎡이다. 현존하는 안채는 고종38년(1901)에 중건된 것이며, 김창숙의 후손 김위가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건물은 홑처마 우진각기와 지붕의 구조이며 좌측부터 부엌, 안방, 마루, 건넌방 순서로 평면형 구성이다. 건물 내에는 13대조 동강 김우옹의 저서인 '속자치통감목'의 목판본이 보관돼 있다.

김창숙의 호는 심산·벽옹, 본관은 의성으로 아버지 김호림과 어머니 인동장씨 사이의 장남이며, 동강 김우옹의 13대 손이다.

김창숙은 아버지가 성주 일대의 유력한 양반 세력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유학에만 머물지 않고 스승인 이승희로부터 다양한 지식을 전수받게 되면서 근대적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스승인 이승희와 함께 서울에 상경해 '청참오적소'를 올리고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의 처형을 성토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자 심산은 전국의 유림세력을 규합해 130명의 서명으로 일본의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전국 유림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등 꾸준히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들로 인해 일본으로부터 수배령이 내려져 14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극심한 고문으로 다리가 마비돼 형집행정지를 받고 출옥을 하게 된다. 1930년대 후반 일본이 창씨개명을 강요하던 시대적 상황에서도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등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았다.

1945년 일본의 패망을 눈앞에 두고 그는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됐다가 일본 경찰에게 발각돼 구속됐으며, 왜관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게 된 이력도 특이하다.

광복 이후 심산은 전국 유림들의 지지를 받아 유도회 총본부위원장으로 선출됐으며, 성균관대학을 창립해 초대총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심산만초'와 '벽옹만초' 등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 취임 후에도 독재와 부정을 저지르는 과정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을 제기하며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이는 등 해방 전후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는 1962년 8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국가적인 사회장으로 장례식이 치러졌으며,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됐다.

심산 김창숙 생가에는 현재 그의 후손이 직접 기거하고 있다. 이에 따라 행정 차원의 체계적인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생가의 상황은, 해방 전에도 후에도 오로지 조국만 생각했던 지조있는 한 유생의 굴곡진 삶의 흔적이 그대로 방치되는 것만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취재1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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