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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 성 규 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회장 |
ⓒ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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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조실록의 성주사고, 세종왕대의 성주 태실, 가야 멸망 후 월광태자, 신라 멸망 후 경순왕의 왕자 김덕지, 장희빈 사건 때 인현왕후 등의 역사적 인물들이 성주로 들어온 이유
- "남인세력과 장희빈에 밀려 성주 권역의 청암사에 5년 동안 유폐되어 있던 인현왕후의 복위와 조상 대대로 성주에서 살아온 고령박씨 성주파의 후손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어 5년간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온 역사는 서로 닮아 있다." 본문 중에서
오늘은 성주군 금수초등학교(초등학교) 28회 동기생들이 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김성규 회장을 포함하여 15명이 금수초등학교 터에 모여 반백년만에 성주댐을 지나 무흘구곡을 올라가 증산면 청암사로 소풍을 가는 날이다.
청암사가 위치한 증산면은 현재는 김천시이지만 1905년 이전까지는 성주에 속해 있었다. 반백년 전 할미산성의 첫 소풍 이래 이번 금수 28회 동기생들의 소풍은 장희빈사건으로 인현왕후가 청암사에 유폐되었다가 5년만에 다시 극적으로 환궁하는 의미를 답사하는 것이다.
장희빈 사건으로 폐위된 인현왕후는 왜 성주에 속해 있던 청암사로 와서 들어왔을까? 그것은 역사적으로 성주(星州)는 들어오기만 하면 다시 재기(再起)한다는 약속의 땅, 권토중래의 땅이라는 오랜 전승이 있어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 가야가 멸망 후 월광태자가 수륜면 월광사로 들어온 것은 왕조의 부활을 꿈꾼 곳이 성주였다는 것이며, 신라 멸망 후 경순왕의 왕자 김덕지가 수륜면 법수사로 들어온 것도 신라의 부활을 성주에서 기대한 것이다.
조선조 숙종 때 장희빈으로 인하여 인현왕후가 당시 성주목이 었던 증산면 청암사로 은거한 것도 다시 한양으로 환궁할 수 있는 권토중래의 땅이 성주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의 성주사고에 있었다는 것도 왕조실록이 분실되면 다시 되찾을 수 있다는 신뢰가 있었다는 것이며, 세종왕대의 성주 태실 또한 왕자들의 생명이 어떠한 어려움에 닥치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기원의 땅이 성주였기 때문이다.
인현왕후는 첨암사에서 환궁을 기도한지 5년만에 숙종의 사과편지를 받고 다시 한양으로 환궁했다. 그것은 조상 대대로 고령박씨 성주파가 대대로 살아왔던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되었으나 5년만에 다시 돌아온 것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러한 권토중래의 약속의 땅 성주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이 인현왕후가 성주목 청암사에서 기사회생하여 장희빈 세력을 무찌르고 다시 환궁했던 역사적 사건이다.
인현왕후의 은거처 증산면 청암사는 858년(헌안왕 2) 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한 사찰인데 현재는 직지사 말사로 멋진 계곡 경관이 수려하다. 청암사에 있던 200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신중도와 진영각에 모셨던 22위의 조사진영은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청암사에 은거하던 인현왕후에게 수도암은 여차하면 거기에서 더 깊숙한 산골에 위치한 수도암으로 숨어들어갈 수 있는 곳으로 여겼을 것이다. 수도암은 청암사의 부속 암자로 859년에 도선(道詵)이 청암사를 창건한 뒤에 수도처로서 수도암 터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7일 동안 춤을 추었다는 전설이 있다.
청암사에는 신라 때의 암자인 수도암이 있는데 국가 지정 보물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두 점과 동서 삼층석탑이 있다. 석굴암본존불만큼 잘 생긴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석굴암 불상보다 80㎝ 작으며, 9세기에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북석리에서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이 불상 운반에 골몰하고 있을 때 한 노승이 나타나서 등에 업고 이 절까지 운반하였는데, 절에 다 와서 칡덩굴에 걸려 넘어졌다고 한다. 당시 노승은 산신령을 불러 크게 꾸짖고 칡덩굴을 모두 없애게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이 절 근처에는 칡덩굴이 없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또 3층 석탑은 도선이 창건 당시에 이 절터가 마치 옥녀(玉女)가 베를 짜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지형이라 하여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뜻으로 두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인현왕후가 청암사로 온 배경이 옥녀 전설도 한 몫한 것으로 보인다. 베틀 위의 옥녀는 옥황상제로 곧 복귀하는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