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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들어오기만 하면 재기(再起)한다는 약속의 땅, 권토중래의 땅, 성주②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22.12.06 09:21 수정 2022.12.06 09:23

↑↑ 김 성 규 코리안신대륙발견모임 회장
ⓒ 성주신문

 

(전편에서 이어짐) 그런데 이러한 인현왕후의 역사가 깃든 청암사가 왜 성주에서 김천시(옛 금릉군)로 편입되었을까?

1905년 3월 대한제국의 행정개편으로 성주에 속해 있던 운수면, 덕곡면, 성산면, 다산면이 고령군으로 편입되고 같은 성주목의 노곡면이 현풍군(현 달성군)으로 이속되고, 성주에 속해있던 증산면이 지례군(현 김천시)으로 각각 이속되었기에 숙종 때 장희빈 사건으로 인현왕후가 청암사로 온 것은 성주에서 일어난 역사라고 '성주역사'를 쓴 나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대한제국은 왜 거대한 성주목을 쪼개어 주변의 네 개의 군으로 편입시켰단 말인가? 그것은 설날 조상에게 제사까지 하는 원조절사(元朝節祀)까지 행하며 구정 설을 지키려한 성주목의 막강한 정치적 힘을 누르려 한 결과다. 성주를 축소시키라는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성주에 속해 있던 여러 면을 주변 군(郡)들로 나눠주도록 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분석한다.

음력 설날 조상에게 차례상을 차린 역사가 성주에서 시작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추석의 차례상은 신라 때부터 내려온 것이지만 설날은 대대로 살아 있는 어른들에게만 세배를 올렸었다. 그러다가 설날도 조상에게 차례상을 차려 절을 한 이른바 원조절사(元朝節祀)라는 설날 아침 제사를 지내게 된 것은 경상북도 성주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왜인들이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면서 그 이듬해인 1896년 음력 설을 버리고 양력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에 저항하여 설을 지키려는 굳은 맹세를 조상에게 드리는 제사를 하게 된 곳이 성주였다.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조정에서 강요하는 양력 설날 강조에 저항하여 음력 설날을 지키려고 음력 설에 최초로 제사상을 차린 것은 1896년(고종 33년)에 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의 성산 여(呂)씨 문중에서 시작되었다.

설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조부모에게 세배를 올린 뒤, 선묘에게 음력 설을 굳게 지키겠다고 다짐하는 맹세의 제사(誓祭)를 올림으로써 설날 제사는 처음으로 성주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며 그 후에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이 오늘날 설날 조상에게 올리는 제사의 역사다.

이러한 성주의 파워를 누르려고 거대한 성주목의 6개 면을 주변 다른 군으로 이속시킨 것이니 그때에 청암사가 있던 증산면도 금릉군(현 김천시)으로 편입 당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905년 성주가 축소되기 이전의 성주목에 속해 있던 네 개 군에 이속된 6개 면들의 역사는 오늘날 성주가 새겨야 할 역사 권역으로 새겨야 한다. 고구려 땅이 현재 중국에 속해 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역사로 새겨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면에서 인현왕후가 성주로 도피한 역사를 성주가 새겨주어야 한다. 인형왕후의 성주목 청암사에 은거한 것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왕조의 정치적 수난에서 피난처가 된 성주 역사를 계승하고 있었다.

금관가야가 난을 당할 때 그 왕자가 성주 벽진가야 지역에 피난을 와서 3층으로 된 거대 공깃돌을 남겼다는 전설이 있다.
 

역사적 사실로는 앞서 언급한대로 대가야가 멸망하자 그 마지막 왕자인 월광태자(月光太子)가 세상을 등지고 들어왔던 곳도 성주군 수륜면에 있는 월광사였다. 나아가 신라가 멸망하자 경순왕의 계자(季子:막내 아들) 김덕지가 머리를 깎고 범공(梵空)이라는 법명으로 귀의한 곳이 성주 수룬면 해인사 가는 길목의 법수사다.

성주(星州)는 조선왕조 전기 4대사고로 조선왕조실록이 보관되던 전기 사고(史庫)의 하나로 실록의 은거지가 된 곳이기도 하다. 한양의 실록이 훼손될 경우 되살릴 수 있는 것이 성주사고의 실록이었다.

뿐만 아니라 월항면의 세종대왕자태실은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의 태실이 모여있는 곳이다. 조선왕조 개창자들은 왕자들이 어떠한 수난을 당하더라도 '부활 환생의 땅'으로 성주를 태(胎)를 묻는 땅으로 선정한 것이다.

인현왕후의 성주목의 청암사로 은거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으로 성주가 '재기의 땅', '약속의 땅'에 대한 기원의 전승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장희빈 사간으로 왕비 자리에서 폐위된 인현왕후의 재기는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되어 5년 수감을 감수했던 박근혜 대통령의 명예회복을 기대하게 한다. 인현왕후(민씨)가 성주목 금수면 무흘구곡 골짜기 안쪽의 청암사에 5년간 머물다가 복위되어 다시 환궁했기 때문이다.

333년 전, 조선시대 제19대 숙종(이순)의 왕비 인현왕후가 폐위되어 은거생활을 하던 성주목 청암사(주지 상덕스님)에서 그 유폐를 끝내고 복위식을 하면서 다시 대궐로 환궁한 일은 지금도 해마다 청암사에서 수백명 인파와 함께 국회의원 등 각 기관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있다. 금년에도 지난달 10월 2일에 4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천년고찰 불령산 청암사 보광전 앞마당에서 뮤지컬 인현왕후가 열리고 인현왕후 복위식이 재현되었다. 이것은 김천시에 속해 있으나 그 일어난 사건은 성주목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다.

인현왕후 복위식 행사는 11시 자양전에서 인현왕후 애니메이션 상영과 대웅전 앞마당의 사진전으로 시작된다. 점심공양 후 개최된 복위식 재현의식은 호송예관(김충섭 시장 분)이 "전 왕후 여흥 민씨에게 내리노라, 즉시 환궁토록 하라!"는 숙종의 교지를 전달하고 왕후는 정복으로 환복한 후 풍물패를 앞세우고 내명부 상궁과 내금위 별장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를 타고 환궁하는 행차의 재현 순으로 진행된다.

장희빈으로 말미암아 인현왕후는 23세에 폐비 서인이 되어 성주목 청암사로 들어온다.그리하여 숙종은 인현왕후는 폐출되고 그 자리에 중인역관의 서녀천출인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했다. 그러자 세간에는 다음과 같은 풍자노래가 퍼졌다고 한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일세.
철을 잊은 호랑나비 오락가락 노닐더니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제철 가면 어이 놀까."

여기에서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를, 장다리는 중전 장씨를 의미하고 있었다. 숙종이 장다리 장희빈 장옥정에서 벗어나, 미나리 인현왕후를 복위시키라는 뜻이다.
 

풍자에는 노래 외에 소설도 나왔다. 김만중의 '사씨남정기'가 그것이다. 이 소설은 명나라 유현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다시 맞아들인 다음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당시 인현왕후와 중전 장희빈을 빗댄 풍자로 지어진 소설이다.

결국 민심 이반을 본 숙종은 장희빈에 대한 애정이 사라진 갑술환국 이후 인현왕후 복위를 윤허한다.

그리하여 인현왕후는 성주로 들어온지 5년만에 재기하여 한양으로 환궁한 것이다. 그리하여 성주는 들어오기만 하면 부활 재기하는 명승으로 이름을 더욱 날리게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성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고령박씨 성주파인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다. 국회의원 출마 때부터 선거운동을 시작할 때 먼저 성주에 들러 참외밭을 찾아 참외를 어루만진 후에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인현왕후가 장희빈에게 억울하게 밀려나 청암사에 5년이나 유폐되었듯이 박근혜 대통령은 탄핵되어 5년을 감옥에서 보냈다가 다시 출옥하여 달성 비슬산 기슭으로 돌아갔다. 달성 비슬산도 성주목에 포함되었었다.

인현왕후가 완전히 복권되었듯이, 윤석렬 대통령이 약속했듯이, 박근혜 대통령의 명예는 완전히 회복될 것이다. 역사적 인물들로 보자면 박대통령의 조상들이 대대로 성주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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