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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볏짚 횃불의 추억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22.12.20 09:43 수정 2022.12.20 09:43

↑↑ 석 종 출 펫헤븐AEO 대표
ⓒ 성주신문

 

겨울철 음력 보름 언저리에 하얀 달빛은 고요한 밤을 따시게 느껴지게 한다. 시골집 마당에 내리는 하얀 달빛은 다른 불 밝힘의 도구가 없어도 사물을 분간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만큼 밝고 맑다.

 
신작로도 생기기 전에는 두 자 정도의 좁은 길 폭으로 온 산골끼리 연결이 되어 있었다.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기 전에는 대부분 그랬었다.

내가 자랐던 산골 동네에서 가까운 읍내는 왜관읍과 성주 읍내 강 건너 대구가 큰 도시였다. 성주군 선남면 오도리 산골짝에서 왜관 읍내까지 겨울밤에 단체로 서부영화를 보러 갔던 추억이 있다. 준비물은 단단히 묶은 집단과 집단을 꽂을 막대기 하나면 충분했다.

형님들과 또래 도당들이 모이면 여남은 명이 되었다. 해가 지고 달이 올라오면 고개를 넘고 강둑을 따라 왜관 읍내까지 거의 두 시간을 걸어서 갔다.

그 당시 왜관은 미군이 주둔하는 큰 기지가 있어서 아무래도 선진 문물이 먼저 선을 보이는 지역적인 영향도 있었겠지만 성주에는 없었던 영화 상영 극장이 있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집안 형님은 용케도 서부영화가 상영되는 소식을 잘 알고 있었고 쌈짓돈을 그나마 문화행사에 쓸 기회를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모두 다 왔나! 하나 둘 셋... 아홉 명이 함께 간다. 앞사람 발자국을 놓치지 말고 돌부리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거라. 출발하자." 대장 뻘 형님이 앞장을 서고 졸개들이 한 줄로 문화행사 길에 오른다. 선두와 맨 뒷사람은 짚단에 불을 붙여 야간 행군을 시작한다. 아마도 짐승들을 피하기도 하고 길을 밝히기도 하기 위함 이었으리라. 그때 밝고 맑게 길을 비추어 주던 하얀 달빛이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보름 언저리 구름 한 점 없는 하얀 겨울 달빛의 산골 길은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긴긴 겨울밤은 청소년들에게는 공부만 하고 있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어느 집 대문간 사랑채에 모여앉아 화투놀이나 윷놀이로 동전이 모아지면 십리 길이나 되는 면소(면사무소가 있는 곳)수퍼 가게까지 짚단에 불붙이고 하얀 백냇길을 따라 라면을 사러 다녔던 추억이 아스라하다.

육십 년 전의 일이지만 기름이 동동 뜨는 그때 야밤에 먹었던 라면의 맛은 지금은 느낄 수 없는 맛이 되었다. 남자아이들이 십 리 길을 횃불을 들고 라면을 사올 때까지 여자아이들은 짚둥우리에 저장된 씨 고구마를 숫자대로 삶는다. 땅속에 묻어둔 김칫독에서 꺼낸 살짝 얼음이 붙은 배추김치는 삶은 고구마와 궁합이 맞다.

지금 생각하면 먹거리가 부족했던 시절인데도 요즘에는 건강식품으로 인기가 있는 고구마랑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발효 유산균 식품인 김치를 잘 조화롭게 취했으니 지금도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왜관에서 낙동강을 끼고 고향으로 내려오는 길에 떠올려보는 달빛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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