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사설
독자마당
| ↑↑ 주 설 자 시와시학회 회장 |
| ⓒ 성주신문 |
'어머니!', 언제 불러보아도 가슴 깊이 와닿는 이름이다. 가부장적 권위주의의 오랜 전통을 이어온 우리나라의 경우 어머니는 언제나 자식들에게 심리적 위안과 포근함을 주는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은 본능적이고 헌신적이기까지 하며 그 모성애는 인간뿐 아니라 동물 세계에서도 관찰된다. 서양에서는 '펠리컨'이라는 새가 부리로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내거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새끼들에게 먹여 살린다고 전해진다.
이 지극한 모성애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으로 상징하여 교회에서는 성화(聖畵)나 찬송가 등에서 그 새를 등장시키기도 한다. 신생아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가장 편안한 최초의 애착 관계가 어머니이다. 그래서 자식들은 언제나 어머니를 통해 삶의 안정과 평화로움을 느낀다. 이렇게 자식을 희생적으로 돌보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 슬픔이야 말할 것도 없다.
우리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어머니의 호적 이름은 '방화선'이지만 모든 여자들이 그렇듯이 시집을 와서는 그 이름을 쓸 기회가 없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 대신 '주朱 부잣집 며느리' 또는 '주 부잣집 마담'으로 불리었다. 어머니의 이 호칭은 우리 동네 산막터만이 아니라 성주군 어디에서나 다들 알고 그렇게 불렀다.
어머니는 이 이름값을 하려는 듯 체통을 지키려고 무척이나 애를 쓰셨다. 밖에 모임이나 일이 있어 나가실 때는 일등 신사가 되었다가 집에 와서 논이나 밭에 일을 하러 가실 때는 몸뻬를 입고 시골 농부가 되었다. 특히 성당에 가실 때는 아무리 더워도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나 흰 치마에 옥색 저고리, 또는 안동포로 만든 갈색의 치마저고리를 곱 게 차려입고 가셨다. 그랬다가도 집에만 오시면 밀짚모자를 쓰고 복장도 일하는데 편하도록 몸뻬에 블라우스를 입고 일꾼들이 먹을 음식을 챙겨 일터로 바로 나가셨다.
외출을 하거나 일을 하러 나가시다가 동네 어른들을 만나면 항상 깍듯이 머리 숙여 "어르신들 나오셨습니까"라고 인사를 하셨다. 그러면서도 동네 사람들은 물론 어려운 사람을 보면 조금이라도 도와주려고 애를 쓰셨다. 그만큼 이웃을 후하게 대하셨다. 인심이 후하다 보니 동네 사람들이나 지인들은 모두 다 어머니를 좋아했다. 이러다 보니 사람들은 "치마를 걸쳐서 여자지 정말 남자보다도 훌륭한 여걸"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자식은 인생의 목적이자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식들을 위해 모든 고난을 이겨가며 열심히 살아오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할 때면 지금도 목이 메고 눈물이 난다.
자식들을 위해 열심히, 그리고 신나게 사시던 어머니가 자식들을 모두 키워 결혼을 시키고 난 후에는 무척이나 외로워하셨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큰아들과 둘째 아들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하셨다. 서울에 사는 큰아들이 "어머니 서울에 올라오셔서 같이 살아요."라고 몇 번이나 모시려고 내려와 부탁을 해보았지만 어머니는 "자식들 힘들게 고생시키지 않겠다."라며 산막터에서 혼자 사셨다. 더욱이 대대로 살아온 산막터 큰 집을 어쩔 수가 없어 집을 떠나지 않고 혼자 사셨다.
그런 어머니가 염려가 되어 내가 전화를 걸 때면 그 목소리에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어머니를 뵈러 산막터 집에 갔는데 나를 본 어머니는 너무나 좋아하시며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이때만 해도 그동안 친하게 지내던 이웃이나 친척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또 젊은 사람들은 이사를 가버려 이웃이라고 해도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어서 외롭게 지내고 계셨다. 특히 저녁 때 잠을 혼자 잘 때는 외롭기도 했지만 시골이고 집이 커서 무섭기도 했다. 그래서 이웃에 새로 이사를 온 할머니를 모셔와 함께 잠을 자셨다. 그리고 할머니가 자고 갈 때면 고맙다고 돈도 만 원씩 드려야 온다고 하셨다. 그런데도 일이 있어 오지 않을 때도 많다고 하셨다.
내가 어머니를 찾아가 하루나 이틀을 묵고 돌아올 때는 나를 두두몰골까지 바래다 주셨다. 찔레꽃이 핀 둑길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어머니와 둘이 걸어 두두몰골에 다다르면 어머니는 울먹이면서 "언제 또 올래" 하시며 묻고 또 물으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나도 눈물을 흘리며 왔다. 어머니의 모습이 안쓰러워 제대 로 인사도 못하고 한참을 내려와 돌아보면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그 자리에 서서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계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 아이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나니 어머니의 외로운 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어머니의 그리움을 담아 「찔레꽃」이라는 시를 지었다. '찔레꽃'은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이 시는 내가 기회가 될 때면 여러 사람들 앞에서 낭송을 하며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있다.
어머니, 언제 불러보아도 마음 떨리고 아픈 이름이다. 아버지도 어버이지만 어머니같이 자식을 사랑하는 분은 없다는 고려 민요의 가사처럼 어머니의 큰 사랑은 이 세상 누구에게나 가슴 깊이 와닿는 아름답고 따뜻한 희생의 표징이다. 이 눈보라치는 인생의 벌판에서 자식들을 치마폭 속에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어머니의 한 생애는 거룩한 성자의 삶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