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사설
독자마당
| ↑↑ 김 지 수 前 도의원 / 성주한의원 원장 |
| ⓒ 성주신문 |
▶▶1341호에서 이어집니다.
Ⅱ. 작곡가 배상태
한국 대중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원로 작곡가 배상태(裵相台) 선생의 생애와 주요 히트곡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특히 불세출의 가수로 불리는 '배호'와 전설적인 콤비를 이뤄 1960~7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던 분으로 유명합니다.
1. 생애(1939~2025)
·출생과 초기 활동 : 1939년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명포1리 금은계 마을(외가 출생)에서 태어나 성암초등학교를 마친 뒤 대구성광중학교를 제1회로 졸업했습니다. 1956년 대구KBS 전속 가수 1기생으로 발탁되어 가수로 먼저 음악활동을 시작했으며, 이후 서라벌예술초급대학(현 중앙대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작곡을 공부했습니다.
·작곡가 데뷔 : 해병대 군악대 복무시절 작곡 발표회를 가지기도 했던 선생은, 1960년대 중반 송춘희의 <송죽부인>을 발표하며 작곡가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배호와의 운명적 만남 : 그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친척 조카였던 가수 배호와의 만남입니다. 신장염으로 투병 중이던 무명 가수 배호를 설득해 자신의 곡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르게 했고, 이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두 사람 모두 당대 최고의 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후학 양성과 영면 : 이후 '배상태 작곡사무실'을 운영하며 수많은 신인을 발굴하고 40여년간 2천여곡을 작곡했습니다. 가요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16년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을 수훈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최근인 2025년 3월 26일, 만성신부전증 등 지병으로 향년 86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2. 주요 히트곡
배상태 작곡가는 인간의 애절한 감성을 멜로디로 번역해 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지녔으며, 특히 배호의 호소력 짙은 저음과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배호와 함께한 명곡들
-<돌아가는 삼각지>(1967) : 배상태 작곡가의 최고 대표곡입니다. 비 오는 날 전차를 타고 삼각지를 지나며 영감을 받아 작곡했으며, 발매 후 20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습니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1967) : 연이은 대히트곡으로, 병세가 악화된 배호가 청량리의 병원에서 힘겹게 녹음한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마지막 잎새>, <0시의 이별>(1971) : 배호의 유작이 된 곡들로, 29세에 요절한 천재 가수의 마지막을 장식한 애절한 명곡입니다.
-기타 : <황토 십리길>, <능금빛 순정>, <비겁한 맹서> 등
·그 외 가수의 히트곡
-김상희 <서울의 버스 차장> (1967)
-강소희 <뻐꾹새 우는 마을> (1967)
-남진 <그 세월> (1973)
-박일남 <하동아줌마> (1969)
한국 트로트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배상태 작곡가와 가수 배호의 콤비는 오늘날까지도 가요계의 전설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서울 용산구 삼각지역 인근에는 그를 기리는 '배호 길'과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가 세워져 있기도 합니다.
Ⅲ.가수 배호
가수 배호(본명 배만금, 배신웅 1942~1971)는 1960년대 후반 대한민국 가요계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가수로, 중후하고 호소력 짙은 저음과 가슴을 울리는 창법으로 대중의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마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짧고 강렬했던 생애는 한국 대중음악사에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그의 생애를 시기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출생과 불우했던 어린 시절 (1942~1950년대)
·성주와의 관련성 : 아쉽게도 지금은 후손이 없으며, 성주배씨 정절공파입니다(성주읍 대황 2리. 구동골). 배상태 선생의 9촌 조카, 즉 삼종질(三從姪)입니다.
·타국에서의 출생 : 배호는 1942년 중국 산둥성 지난시(山東省 濟南市)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이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광복 후인 1945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인천과 서울 등지에서 자랐습니다.
·가난과 시련 : 중학교 시절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집안 형편이 크게 기울었습니다. 결국 가난 때문에 부산 삼성중학교를 중퇴해야 했고, 소년 가장으로서 힘든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 드러머에서 가수로의 변신 (1950년대 후반~1963)
·음악과의 만남 : 외삼촌인 작곡가 김광빈의 영향을 받아 음악에 눈을 떴습니다. 10대 후반부터 미8군 무대와 카바레 등에서 드럼을 치며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며, 뛰어난 리듬감으로 밴드 마스터를 맡을 만큼 드럼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가수 데뷔 : 1963년, 21세의 나이에 예명 '배호'로 외삼촌 김광빈이 작곡한 '굿바이' '사랑의 화살'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는 대중의 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3. 투병과 함께 찾아온 전성기 (1966~1968)
·신장염 발병 : 1966년, 2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급성신장염(신부전증) 판정을 받으며 그의 삶을 옭아맨 기나긴 투병 생활이 시작됩니다.
·운명의 곡 '돌아가는 삼각지' : 병상에 누워있던 1967년, 작곡가 배상태 선생이 그를 찾아가 '돌아가는 삼각지' 곡을 건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휠체어에 앉아 녹음한 이 곡은 라디오 차트에서 무려 20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며, 무명이었던 배호를 단숨에 최고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불꽃 같은 활동 : 이후 병마와 싸우면서도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누가 울어', '비 내리는 명동거리', '마지막 잎새' 등 발표하는 곡마다 연이어 메가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4. 고독한 스타의 상징과 안타까운 죽음 (1969~1971)
·트레이드마크 : 중절모와 트렌치코트, 짙은 선글라스는 배호의 상징이었습니다. 이는 멋을 내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신장염 투병으로 인해 심하게 부어오르거나 수척해진 얼굴과 눈을 가리기 위한 슬픈 이유가 숨어 있었습니다.
·마지막 투혼 : 무대에서 쓰러져 업혀 내려오는 일이 잦았지만, 병상에서 링거를 맞다가도 무대에 오를 만큼 음악에 대한 엄청난 투혼을 보였습니다.
·영면 :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1971년 11월 7일, 29세의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수많은 팬들이 장례식장으로 몰려와 오열하며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습니다. 당시 팬들이 소복을 입고 장례차를 뒤따르던 모습은 한국 가요계의 전설적인 일화로 남았습니다.
5. 가요계에 남긴 유산
짧은 활동 기간 동안 무려 300여 곡을 남겼습니다. 우수에 찬 독보적인 그의 음색은 나훈아, 조용필 등 후대 전설적인 가수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현재 삼각지역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그의 노래비가 여럿 세워져 있으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모창 대회가 열릴 만큼 '불세출의 가인(歌人)'으로 굳건히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상의 자료를 살펴보았듯이 백년설 선생과 배상태 선생은 성주에서 출생하셨고, 배호 선생은 부친이 독립군(광복군) 대위였기에 '중국 산둥성의 지난시'가 출생지이지만 그 근본은 성주이며 배상태 선생의 9촌 조카여서 우리 고장과는 불가분 관계입니다.
특히 배호 선생에 대한 추모 열기는 지금도 전국에 30여 가요제가 산재하여 하루빨리 성주와의 관련성으로 선점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곧 우리 지방을 전국적으로 홍보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금 처럼의 특정인 모두를 제외한 "성주참외가요제" 명칭 사용만을 지속한다면 그저 무난한 이름 외에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처럼 특산품 및 자연경관을 내세운 가요제는 이미 지역마다 상당합니다.
예컨대 영양 산나물 전국가요제, 괴산 고추가요제, 음성 품바가요제, 진안 홍삼가요제, 금산 인삼가요제, 대가야 왕릉 전국가요제, 장수 한우랑 사과랑 가요제, 함안 처녀뱃사공 전국가요제, 포항 구룡포 과메기가요제, 기장 멸치가요제 등이 그러합니다.
그외 이런 형태도 꽤나 됩니다. 제천 박달가요제, 영동 추풍령가요제, 사천 삼천포아가씨 전국가요제. 사천시 남일대 전국청년 트롯가요제, 밀양 아리랑가요제, 목포 항구가요제, 포항 해변전국가요제, 남원 춘향가요제, 봉화 글로벌 가요제, 부여 백마강가요제, 부산 해운대가요제 등입니다.
물론 유사한 부류가 아무리 많을지라도 선의의 경쟁 끝에 우뚝 솟을 수도 있지만 그간 지나온 시간 가운데서의 우리 가요제 수준은 존재 자체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더 이상 우리 지역의 장점으로 내세울 수 있는 분들을 제외한다는 자체가 매우 아쉬운 일일뿐만아니라 이는 바로 현상태에서의 새로운 방향 제시를 강변하는 반증이 되고도 남습니다.
이미 전국적인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 참외만을 우선적으로 내세우기 보다는 가요제에 걸맞은 인물과 특산품을 함께 자랑한다면 이야말로 금상첨화 아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백년설 선생의 경우 2002년 국민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고, 2009년에는 친일인명사전에서 제외되어 우리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해주고 있습니다.
배상태·배호 콤비는 대한민국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여서 여타 지역과는 그 관련성과 긴밀성이 우리와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배호 가수는 작은 큰 아버지(배경진, 대한광복군상사1910-1948)와 아버지(배국민, 대한광복군제3지대 대위, 1912-1955) 모두 독립군이자 요절한 분들이어서 더욱 의미가 크게 다가옵니다.
'백배성주참외가요제'는 언뜻 백년설·배상태·배호 선생을 기념하는 '성주참외가요제'라는 의미와 '100배의 성주참외가요제'가 겹쳐진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성주이씨(백년설=본명 이창민)와 성주배씨는 우리 고장 고유의 성씨인데다 큰 문중이어서 자긍심이 한층 커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흔히 시작이 반이라고 합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는다고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보물을 가진들 인과 관계가 없으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명칭이야 어떻든 지금 성주군은 면적, 주민수, 예산 등 대부분의 측면에서 다른 지역에 비할 바 아닐 만큼 위축되고있으니 이제 선택하고 집중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중해졌습니다.
늦었다고 여기는 지금이 가장 빠르다는 점에서 하루빨리 가부의 결론을 내려 집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이처럼 우리 삶의 가장 큰 실패는 아무런 시도조차 않는 바로 그 사실일 것입니다.
무언가 일을 성취하자면 방법이 보이고, 거부하자면 핑계가 보인다는 경구 마냥 줄곧 반대를 외치자면 무언가 대안을 제시해야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필자가 거듭 제안하는 방안은 백년설, 배상태, 배호 선생 세 분을 기념하는 '백배성주참외가요제'의 발족이 충분한 대안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더이상 백년설 선생의 과오에만 갇힐 것이 아니라 그의 대중문화예술사적 성과를 있는 그대로 평가해 지역 문화 자산으로 다뤄야 할 것입니다.
어언 선생이 가신지도 46년이 지난 즈음을 맞아, 세 분이 더불어 어우러지는 대승적 출발이 될 수 있기를 간곡히 제안드립니다.
혹여 이마저도 어렵다면 최소한 배상태·배호 선생만이라도 공식적으로 앞세우는 '이배성주참외가요제'로 거듭 태어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조금은 성급할 수 있지만 오늘날의 뜨거운 감자를 마냥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거니와 공적과 과오를 함께 수용한다는 의미, 곧 다수의 가인(歌人)과 우리 모두를 기념하는 '백배성주참외가요제'를 제안드리오니 깊이 살펴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