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사설 독자마당

도시락을 싸며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8.04.19 10:09 수정 2018.04.19 10:09

엄 명 자
성주교육지원청 장학사

 
"날씨가 찬데, 도시락을 싸야할까요?"
"등산엔 뭐니 뭐니 해도 도시락 먹는 재미가 최고지."
 
지난 주 까지만 해도 낮엔 25도를 웃도는 기온 탓에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어 벌들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이번 주 내내 기온이 10도 안팎이었고 칼바람까지 불어댔다. 벚꽃은 이내 꽃비로 내려앉고, 꽃이 피었던 자리에 머리카락이 뽑힌 것 마냥 허망함만 남았다.
 
바람도 불고 날씨도 차서 도시락을 싸야할까 망설이고 있는데, 남편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평소 등산할 때 도시락 싸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을 잘 알기에 보온도시락과 보온병을 활용하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지난 토요일엔 수육을, 일요일엔 제육볶음으로 도시락을 준비했는데 호응이 굉장했다. 이번 주엔 포항에서 갓 배달된 문어숙회를 준비하고, 대게를 넣은 씨래기 된장국을 끓였다. 반찬이 너무 부실하다 싶어 노릇노릇하게 부추전도 굽고, 고소한 참기름을 넣고 쌈장과 소금장을 만든 다음 쌈 채소도 곁들였다. 후식으로 딸기와 토마토를 썰어 넣고, 누룽지를 푹 끓여 만든 숭늉도 보온병에 넣었다. 도시락을 싸는데 족히 두 시간은 걸렸다.
 
"요즘 누가 그래 힘들게 도시락을 싸노? 그냥 한 그릇 사 묵고 말제?
 
어제 장을 보러 같이 갔던 지인께서 내가 도시락을 싼다하니 기겁을 하며 하신 말씀이다. 물론 도시락을 싸면 힘들긴 하지만 남편이 좋아할 광경이 마음 속에 그려지면서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땀을 흘리고 올라간 산 정상에서 정성 가득한 밥상을 펴놓고, 꿀맛 같은 식사를 하고 있을 장면을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뿌듯함이 밀려온다.
 
이것이 사랑일까? 뿌듯한 마음을 가슴 가득 채우며 상념에 젖어본다. 시작부터 화제를 몰고 왔던 종편방송국의 '미스티'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했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삶, 그런 삶이 정말 존재하기는 한 걸까?'
 
잘 나가는 앵커 고혜란을 좋아하던 고등학교 때 친구 하명우는 한때의 실수로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19년을 감옥에서 살게 된다. 고혜란 때문이었다. 세월이 지나 출소하게 되지만, 그녀의 곁을 맴돌며 행복을 지켜주려고 애쓴다. 그러나 결국 고혜란의 남편 대신 스스로 살인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으로 다시 돌아간다.
 
작별을 고하기 위해 고혜란을 만난 하명우는 "혜란아, 나 그때 내 선택 후회하지 않아. 단 한 번도 후회해본 적 없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고혜란 넌"
 
그리고 하명우는 독백한다. "다행이라고 생각해 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는 내가 너에게 줄 수 있어서 그래도 나한텐 행복한 시간이었어. 그러니까 너무 오래 울지 마라"
 
나는 이 장면을 보고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며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지켜주고자 했던 그의 마음이 나의 폐부를 깊게 찌르고 있었다. 이 드라마의 OST인 이승철의 '사랑은 아프다' 노래가 구슬프게 흘렀다. 하명우의 사랑은 자신의 불행을 불행으로 여기지 않는다. 마치 사랑을 종교처럼 신념으로 지켜낸다. 그를 보면서 나는 깨닫는다. 사랑이란 힘든 것도 힘들 게 느끼지 않고, 고통도 가슴으로 끌어안으며 행복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생수업'에서 인생이라는 여행을 사랑 없이 하지 말라고 충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삶의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당신의 임무는 사랑을 찾는 일이 아니다. 당신의 마음속에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사랑의 방해물을 찾아내는 일이다.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사랑에서, 삶에서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도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데이비드 케슬러의 '인생수업' 중에서-
 
갈수록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시대에 사랑은 자신에게 유리하거나 필요할 때만 하는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함께한다는 것은 그만큼의 희생과 고통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리고 자신과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스며들기 위해서는 천천히 서로를 위해 기다려 주어야 할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고통과 인내 속에서 지켜낸 사랑이 가져다주는 선물을 찾아내는 일 또한 우리들의 몫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지금쯤 정상에 오른 남편 일행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잡곡밥과 쫄깃쫄깃한 문어숙회를 펼쳐놓고, 손바닥 위엔 상추쌈과 마늘과 청량고추를 올려놓고, 입 한가득 행복을 베어 물고 있을 것이다. 산들바람이 그들의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가 힘들었던 한 주의 기억들을 지워낼 것이다.


저작권자 성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