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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소재 문화재로 문화관광 콘텐츠를 더하다 -1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8.04.24 09:38 수정 2018.04.24 09:38

보물 제1656호 법수사지삼층석탑

성주군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곳곳에 산재한 문화유산, 수많은 명현거유를 배출한 유림의 본고장으로 널리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는 곧 타 지역과 차별화 할 수 있는 우리 지역만의 특화된 강점이자 경쟁력으로 육성 발전할 수 있는 근간이 된다. 이에 지역 소재 문화유산에 대한 소개 및 역사적 배경을 보도함으로써 지역민들로 하여금 자긍심 및 애향심을 제고할 수 있도록 선도하고, 아울러 문화관광산업 발전을 위한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개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 보기로 한다. 【편집자 주】


▶1회 법수사지삼층석탑
▷2회 성주향교 대성전
▷3회 선석사 영산회괘불탱
▷4회 성주향교 대성전
▷5회 명주짜기
▷6회 금봉리석조비로자나불좌상
▷7회 회연서원 및 한강정구신도비
▷8회 심산 김창숙 생가
▷9회 성산동고분군
▷10회 도산서당


↑↑ 수륜면 백운리 소재 법수사지삼층석탑
ⓒ 성주신문



성주 수륜면 백운리 1215-1번지에 소재한 법수사지삼층석탑은 1975년 12월 30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됐다가 2010년 7월 5일 보물 제1656호로 승격됐다.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수사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법수사가 건립될 당시인 신라 애장왕(800~809년)때 함께 조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수사지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중기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화강암을 재질로 해서 2개의 기단부와 3층의 탑신부로 구성돼 있다. 높이 6m의 탑은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함께 우수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평가되고 있다.

법수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써 원래 금당사라고 불렸다. 신라 애장왕3년인 802년에 현재의 수륜면 백운리 중기마을 일대에 건립돼 해인사와 더불어 성주지방의 불교 진원지로 알려져 있다. 고려 중엽에 절 이름을 금당사에서 법수사로 고쳤으며, 임진왜란 이후 폐사가 됐다. 이후 절터 중앙에 마을이 생겨 '중기'라고 불리게 됐다.

'해인사지'에 의하면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막내아들 범공이 중이 되어 법수사에 들어가 해인사를 드나들면서 여생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법수사는 8개의 종각과 1천여칸이 넘는 건물, 100여개의 부속 암자를 거느린 대형 사찰이었다. 그 영화롭던 법수사가 임진왜란 후에 폐사되고 지금은 석축과 당간지주, 삼층석탑만이 옛 영화를 꿈꿀 뿐이다.

현재 이 절터를 중심으로 백운리 골짜기 곳곳에 석탑, 돌기둥, 주춧돌과 암자 등 당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법수사에 안치돼 있던 불상은 법수사가 폐사된 뒤 절 뒤의 골자기에 있는 용기사로 옮겼다가 용기사마저 폐사되자 1897년에 당시 해인사 주지인 범운선사에 의해 해인사 대적광전의 주존불로 안치됐다. 이 불상은 은행나무로 만든 비로자나불로써 높이 2.35m의 좌상이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다.

수륜면 백운리 마을회관 관계자는 "절의 본당이 있던 곳은 지금도 거대한 바위와 수많은 돌로 쌓아올린 축대가 뒤쪽인 서편을 제외하고 남아있다"며 "현재 축대 위는 농지로 경작되고 있으며, 본당터 중간에 3층석탑, 중기마을 입구에 당간지주, 중기마을 동쪽 끝 밭가에 시식대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가야산 남쪽 자락에 있는 법수사와 남서쪽에 위치한 해인사. 1천200여년 전 두 사찰이 비슷한 시기에 가야산 자락에 터를 잡았고, 비로자나삼존불로 인연을 맺고 있지만 현재의 운명은 사뭇 다르다. 황량한 법수사지와 날로 번창하는 해인사를 보며 법수사지삼층석탑이 성주군민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취재1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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