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김 재 성 출향인·유튜버 |
ⓒ 성주신문 |
|
오랜 세월을 밀림속에서 바위 덩어리의 조합물로 존재하다가, 1860년 초 프랑스 박물학자 알베르 앙리 무오(Albert Henry Mouhot)가 진기한 나비를 채집하기 위해 현지 안내인 네 명과 함께 캄보디아의 밀림 속을 들어가다 앙코르와트를 찾게된다. 안내인들은 앙코르와트에서 몇 백년전 사람들이 살았던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당시 텅빈 도시에 주술이 걸린 수 많은 유령이 들끊고 있다고 믿어 어느 지점에 도착하자 더 이상 들어가지 않겠다며 버티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찾게 된 것이 한국의 고대 도읍지 경주와 같은 장엄한 건축물이 있는 앙코라 왕국의 도읍지인 앙코르와트였다.
조선시대에 일관되게 유지되어 왔던 왕조에 대한 충성심 못지 않게 백성들은 십승지란 단어를 염두에 두면서 살았다. 1592년 왜군의 침입으로 나라는 쑥대밭이 되고, 백성들은 피난을 가며 온갖 고초를 겪게된다. 이후 병자호란, 당쟁, 탐관오리들의 학정, 일제 식민지에서의 피팍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백성들의 마음이 십승지를 지향한 것은 우연이 아닌 듯 하다. 구한말 독립신문에 신채호선생께서 기고한 십승지를 찾아 이곳 저곳을 떠도는 세태를 비판하고 있는 기사만 보더라도 십승지에 대한 열망이 조선사회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침투되어 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전국 산을 넘나들면서 각 고장의 갖가지 사연들에 흥미로움을 가지고 있던 차에 고향 성주를 공부해보고자 하는 마음에 성산지, 경산지가 십승지란 물음표로 이어 주었다. 그렇게 가야산 십승지를 찾기 시작하며 마치 앙코르와트처럼 박물관 깊숙히 쳐박혀 잊혀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공부를 해 보니 세간의 알려진 사실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부족한 한자 실력과 공부를 손에 놓은지 많은 시간이 흘러 어려움도 많았지만, 가야산 만수동 진실을 밝혀 보자는 열정이 솟구쳐올라 여러 십승지를 둘러 보게 되었다.
가야산 어디엔가 있다는 만수동 표지석을 찾는 과정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예전 마수리에 사셨던 주민들 대부분은 땔감을 하면서, 여름철 소몰이를 하면서, 할아버지로부터 만수동 이야기를 전해 들었지만, 정작 만수동의 사연이 십승지와는 무관하게 살아 오신 듯 하다.
최근에 가야산 만수동 표지석을 찾으려는 노력이 몇몇 조직에서 시도 되었지만, 정확한 위치를 아시는 분들은 고령으로 산행이 힘겨우셨고, 막연히 표지석을 찾아나서기에 초행자들에게는 서울에서 김서방 찾는 꼴이여서 유야무야 상태로 흐르는 세월에 가야산 만수동은 앙코르와트처럼 돌덩이로 방치되고 있었다.
무작정 찾아나선 초행길이 무모하였지만, 지성이면 감천이였을까? 마수리가 고향인 김종욱 친구와 그의 6촌 김종옥님의 아련한 기억들을 끄집어 내느라 수차례 통화도 진전은 없었다. 가야산을 잘 아는 오종수 심마니의 도움을 받기도 하였고, 여름철 소나기를 만나 물에 빠진 생쥐가 되면서 까지 마수폭포 주위를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만수동 표지석에 대한 간절함을 갖고 도전하여 겨우 찾게 되었다. 어른 가슴 높이인 3.2m 크기의 큼직한 누에고치 모양의 화강석에 만수동이 적혀 있는 것이었다. 가로 72cm, 세로 27 cm의 글자 크기로 200여년 정도 지난것으로 추정 된다. 이는 조선 세종대왕 여동생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시집을 간 숙신옹주의 비석 마모도를 비교해서 추측한 것이다.
만수동 표지석은 구구단 9의 배수로 표기되어 있는데, 9는 1에서 9까지 가장 높은 수로, 완전한 10보다 작은 수로 일상 생활 밑바탕에 많이 녹아져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사람은 엄마 배속에서 9개월 동안 자라서 태어나고, 가장 큰집 99칸집, 아흔 아홉 고개, 구사일생, 구중궁궐, 구척장신, 구우일모, 구절판, 구미호 등 9가 들어간 사례이다. 9의 배수를 더하면 다시 9가 되는 (18, 27,36, 45, 63, 72, 81) 영원한 진리임을 알 수 있다. 그외에도 9등급 관직, 바둑 9단, 정치 9단 등 숫자 9와 관련되는 부분이 많은데, 만수동 표지석의 글자 크기도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이 부분은 지속적으로 자료를 축척 연구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가야산은 성주군이 75% 이상을 관할하지만, 해인사의 전국적인 지명도에 밀려 마치 합천군이 주요 관할 행정조직으로 알려지기에 꺼리낌없다는 현실이 서글프지기도 했지만, 가야산 만수동의 진실을 찾아 보자는 오기도 발동했다. 경산지, 성산지를 통한 사실 정리를 위해 관련기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별 반응이 없고, 마수리의 곰시 뒷산에 있는 만수동 표지석을 찾아서 신문에 기고를 하여도, 십승지 만수동은 전국 여러 군데에 소재할 수 있고 아직 규명된 것이 없다라는 강건너 불 구경하는 태도에 난감하기도 했다. 또 십승지 자원 활용을 통한 성주군의 위상제고 및 실질적인 부가효과를 얻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책 출간 위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책은 왜 만드냐는 반응에 적잖이 당황스러울 때도 있었다.
가야산 만수동의 진실 규명이 이루어졌다고 판단될 즈음에, 아무런 근거도 없이 우기는 합천군의 행태와 성주 관련 인사들은 무관심한 것인지 아니면, 생업에 바빠 여유가 없는 탓인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혼자라도 전국 최초의 민간주도형 지역개발의 모델로 개발하자는 결심을 하고, 가야산 만수동 십승지 둘레길도 설계 하였다 . 성주와 가천의 지역민들과 십승지의 자료와 정보 공유를 통하여 실행의 탄력을 높이려 "가야산 활성화를 위한 활동 발대식"도 기획 했지만, 전국을 패닉으로 몰고가는 코로나를 우려하는 주변의 조언으로 실행하지 못했다.
성주 가야산 만수동의 사실을 확인 후 가천면의 청년회, 이장 협의회체인 상록회, 의용소방대, 농촌지도자회, 새마을 부녀회, 새마을 지도자회, 주민자치위원회, 농업경영인회, 지역보장협의회에서 프랭카드로 홍보해 주시는 등 도움도 받았다. 그리고 장정곤 중산리장님을 비롯한 주민들이 가야산 십승지 둘레길 1코스 (임진왜란 피난길) 중산리에서 독용산성 가는길을 정비 해주셨다.
코로나 팬덤도 수그러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그 동안 미루어졌던 가야산 만수동 탐방을 재경 가천 향우회에서 계획한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이나 기쁘다. 늦은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십승지 탐방에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앞으로 가야산 만수동 활성화의 진행에 많은 난관에 봉착될 수도 있겠지만, 성주군민과 가야산을 사랑하는 많은 분들의 관심과 협조가 있다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확신 합니다. 6월 25일에 가야산 둘레길과 만수동 표지석 탐방을 기획해 주신 재경 가천산악회의 회장님, 산대장님과 재경 가천향우회에서 적극적으로 추진 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리고, 항상 관심과 배려를 해주신 한상칠 고문님과 이선호 회장님께 감사함을 전해 드립니다. 이번 가야산 만수동 탐방에 이난희 가천면장님을 비롯한 지역 기관장님께서도 참석 해 주셔서 가야산 만수동 활성활에 지원을 해 주실 예정이라니 감개무량 합니다.
유적의 규모에서 앙코르와트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400년만에 박물관에서 세상으로 알려지게 된 공통된 사연을 가졌으니, 십승지 가야산 만수동도 앙코라와트처럼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십승지의 고향 성주 가야산 만수동이 전국적인 관광지가 되도록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