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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동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 최필동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23.10.24 15:25 수정 2023.10.24 15:25

↑↑ 최 필 동 수 필 가
ⓒ 성주신문

 

초교 때의 은사이시며 사사롭게는 재종형님이시고, 본지 최성고 대표이사의 아버님이신 최훈동(호 丘晃)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오호애재(嗚呼哀哉)!

2, 3년 전 남은와 친족회 때 한번 뵌 이후 죄송하게도 명절 때에나 문안 전화만 드린 게 제 불찰이었음을 돌아보게 되니 더욱 송구하옵니다. 근간에 제 사제(舍弟)로부터 건강하셔서 성음(聲音)만 듣고도 건강이 창창(蒼蒼)하시더라는 전언을 듣기도 했는데, 어이 그리 귀천(歸天)을 하셨습니까.

형님! 형님보다는 '선생님'으로 일컬음이 예를 다함일 것 같으오니 널리 해량(海諒)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으로 호칭하겠습니다.

선생님! 대단히 외경(畏敬)스러우나, 역시 긴긴 조선 왕정이 끝난 그 어려운 때에 일찍이 이 나라 교육 일선의 교단에 서서 봉사하신 선생님이야말로 선견지명이 계셨다고 해야겠습니다. 선생님의 솔하(率下)를 돌아보니 여실하다이옵니다. 선생님의 그 뜻에 따르느라 역시 박사 교수에다 사위까지 교육 현장에서 정려(精勵)하고 있으니 결코 우연은 아니리라는, 제의 짧은 사려(思慮)입니다. 게다가 딸 사위까지 대학 교육의 박사와 교수이니, 외람되오나 '교육의 명가'라 해도 부족함이 없겠사옵니다.

이러한 데다 한 자제는 오늘의 정보통신의 시대를 붙좇느라 저널리스트로 사회봉사를 하고 있으니 더더욱입니다. 어쩌면 선생님이 명가를 이룬 본원(本源)이 아닌가 합니다. 선생님을 존경할 수밖에 없을까 합니다.

위에서 언급은 했습니다만 반세기도 훨씬 전 고명딸 연숙(娟淑)이를 기억합니다. 그날 연숙의 4촌인 성희와 제의 질녀 인숙과 우리 사랑방에서 귀염성 넘치는 세 아이가 재잘재잘 놀던 정경(情景) 말입니다. 그 중의 한 특별히 명민(明敏)한 귀염둥이(연숙)가 오늘에 와서 교육학의 박사가 됐다니, 돌아가신 선생님을 추상(追想)하게 되고, 살 같이 빠른 세월을 느낍니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기쁘고 즐겁고…. 언제 한번 볼 수나 있을런지?

선생님! 저의 지사초등학교 2학년 때입니다. 당시 선생님의 재지(才智)가 얼마나 뛰어나셨던지 사생(社生)책에 실린 사진이 아닌 삽화를 모두 칠판에 그려놓고 강의를 하던 때가 아직도 생생합니다. 책의 워딩과 삽화보다 더 사실적이었으니 아이들은 선생님의 강의에 푹 빠졌던 것입니다.

더구나 아이들은 간혹 스윽 슥 분필 소리만 날 때도 교실이 너무 조용하여 숙숙(肅肅)한 분위기로 칠판만 응시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상당수가 교과서를 살 수 없어 옆자리 아이 책을 함께 보는 시대였으니 선생님의 진지한 칠판 그림솜씨에 흠뻑 빠져 아이들이 그런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땐 저도 4학년이 돼서야 공책을 살 만큼 어려울 시대였으니, 교과서 없는 강의에 그런 재지의 발상이 더욱 놀라울 따름이옵니다. 만일 그때 그림솜씨 없는 다른 선생님이었으면 학습 분위기가 어땠을까를, 지금 돌이켜 보니 정말 상상이 안 됩니다. 그렇게 열악했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가히 상상도 못 할 일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은 아이들 노래 실력을 보느라 노래를 부르게 했습니다. 제 생각에 아이들은 평소 애국가 첫 소절의 '마르고 닳도록'에서 '마'를 꼭 2도 낮춰 부르기에 이를 고치겠다는 우쭐한 생각에서 2도 올려서 불렀더니 '맞게 부르는 구나!' 하시면서 들은 칭찬이 지금도 새롭고 부끄럽습니다. 돌아가셨으니 더욱 애련(哀憐)히 떠오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풍금과 함께 '마르고···' 한 소절만 불러 교정까지 해주면 맞게 부르다가도 전체를 부를 때는 도로 2도 내리는 코믹함도 있었으니, 영락없는 우화(寓話)이겠습니다.

선생님의 영전에 졸문(拙文)을 상장(上狀)하고 추고(推考)하오려니 또 회억(回憶)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재임 때만 해도 이른바 블루노동자만 노동으로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일 때 선생님처럼 '화이트노동자'를 노동인의 범주에 넣는 것이 정서적 불합리가 사실일 때였습니다. 그래서 당국으로부터 상당한 핍박을 받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오늘의 이 광대한 '전교조'의 성공한 조직을 보니, 이 또한 선생님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慧眼)이 있었던 것으로, 사려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선생님! 이 졸문을 접으며 꼭 한 말씀 올리려 하옵니다. 어쩜 그리도 다복하신 4남1녀를 두셨사옵니까? 더욱이 모두들 선생님의 원대한 뜻에 따라 교육으로 입신(立身)을 했으니 말이지요. 성공한 '교육의 명가'임이 여실(如實)하기 때문이옵니다.

선생님! 가톨릭에 돈독하신 둘째 며느님이 기원하심에 따른 명복을 제발 누리시고 승천하시옵길, 이 미욱한 제자가 다시 빌어드리옵니다. 영생복락으로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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