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 환 주 전 재경성주중고 동문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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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숲을아끼는모임 (사)숲과문화연구회(회장 임주훈)에서 올해의 마지막 아름다운 숲탐방 행사로 광릉과 광릉숲을 다녀왔다. (2023.11.18)
이날 우리 탐방객은 우선 국립산림과학원 소속 산림기술경영연구소(과거 중부임업시험장)를 찾아 이곳의 두 박사님으로부터 양묘와 목재 수확에 관한 설명을 들었는데 이들은 이제는 인력으로 모든 작업을 하는 시대는 지나고 모든 것이 기계화 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이야기 하면서 목재 수확기 1대 값이 10억원(오스트리아산) 가까이 한다는 말에 나는 약간 놀랐다.
우리 기술이 모자라 이런 기계를 못 만드는 것이 아니고 수요가 그리 많지 않아서 경제성 문제로 우리나라에서 생산하지 않는다는 부연 설명에 이해가 되었다.
산림기술경영연구소 경내를 둘러보고는 광릉숲을 탐방하기 시작했다. 광릉숲은 조선조 제7대 세조대왕의 능지 부속림으로 설정되기 이전에는 순수한 천연림이었으나 부속림으로 설정된 이후에는 능과 진입로 주변 그리고 광릉 숲을 관통하는 의정부-광릉내 간의 도로변에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등의 천연 치수(稚樹, 어린 나무)를 옮겨 심어 지금은 거목으로 자라나서 광릉숲의 식물, 식생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그 외의 지역에서는 인공식재를 한 나무를 찾아볼 수 없으나 을사늑약(1905년)으로 일제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 1913년부터 시험림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각종 시험.조림으로 임상(林相, forest type)의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광릉숲은 생물권보전지역으로(생태. 문화적 보전 가치가 있는 지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하여 UNESCO에서 인정한 우수한 생태계 지역) 지정되어 있는 한반도의 매우 우수한 생태계의 보고이다.
늦은 점심을(14:30) 먹고는 광릉을 찾았다. 광릉은 조선 7대 세조(1417~1468, 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능이다.
세조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1445년 수양대군으로 책봉되었다. 1453년 계유정란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1455년 단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세조는 재위기간동안 정승들의 권한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였고 국방력 강화, 직전법 실시, 경국대전 편찬 등의 업적을 남겼다.
정희왕후는 1455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469년 성종이 어린 나이로(12살)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광릉은 조선 최초로 같은 능역내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석실 대신 회격(灰隔)으로 바꾸고 병풍석을 생략하는 등 검소하게 조성하였다. 이렇게 하여 왕릉 만드는 비용과 인원을 줄였다. 입구에는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하마비가 남아있다.
세조는 만년에는 왕위 찬탈에 대한 뉘우침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원각사를 창건하였다. 그후 1468년(예종 즉위)에 왕세자 예종에게 선위한 후 하루 뒤에 수강궁 정침에서 52세로 세상을 떠났다.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하는 일부 풍수가둘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날 하루 종일 쌀쌀한 날씨였지만 광릉숲을 탐방 시 임도(林道)를 따라 걸었는데 임도로 발생한 절개지(비탈면) 상단에 떡갈나무와 다른 나무의 뿌리가 한테 엉켜서 두종류의 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고 숲탐방위원장인 김기원 교수는 나무는 저렇게 서로 감싸 안으면서 숲을 이루는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리 인간은 서로 시기하고 원망하면서 사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아름다운 숲탐방울 하는 우리들은 나무처럼 살자고 하여 그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은 그에 호응하여 숲탐방의 보람을 느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