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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고택의 재발견, 성주 한개마을 제 2회

임호동 기자 입력 2015.06.16 14:07 수정 2015.06.19 02:07

2회 한개마을에 집성촌을 이룬 '성산이씨'

↑↑ 돈재 이공 신도비
ⓒ 성주신문

게재순서
1회 성주 한개마을의 어제와 오늘
2회 한개마을에 집성촌을 이룬 '성산이씨'
3회 문화재 보존에 의미를 둔 사람들
4회 관광명품으로 거듭나는 '고택'
5회 한개마을이 나아가야 할 길

우리가 알고 있는 한개마을에는 굽이굽이 사연 있는 집들이 즐비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도 많이 있다. 특히 북비고택은 조선 궁궐과 얽혀 있다. 조선시대 중에서도 가장 흥미진진한 영조와 사도세자, 정조와 연관돼 있다. 이런 역사적 이야기를 모르고 있는 지역민도 많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스토리텔링으로 연계해 관광산업을 발전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

2편에서는 한개마을에 집성촌을 이룬 성산이씨 후손들의 이야기와 성산이씨가 배출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한개마을은 성산이씨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으로 크고 작은 한옥들이 짜임새 있게 배치돼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양반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의 나이가 500년을 넘다보니 걸출한 인물도 여러 명 배출했다.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를 비롯해 응와 이원조, 한주 이진상 등 이름난 큰 유학자와 독립운동에 헌신한 대계 이승희 등의 인물을 배출했다.
성산이씨의 시조는 이능일로서 후삼국시대와 고려 초기의 인물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 태조 8년(925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군사를 일으켜 조물성(현재 김천시 조마면)을 침공하자 후삼국을 통일했고, 이에 공신들을 포상했는데, 여기에서 이능일은 벽상공신삼중대광을 봉하했다. 태조 23년(940년)에는 전국의 지방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성산군과 주변의 5현을 통합해 경산부로 승격시켜 이능일이 이곳을 다스리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오늘날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 일대는 이능일의 세거지로 알려져 있고, 그 자리에는 당시에 만들어 사용했던 우물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한개마을은 조선 세종 때에 '이우'에 의해 개척됐다. 세종 21년(1439년)에 사헌부의 주청으로 오늘의 성주읍 경산리에 성주사고를 설치하고 역대 국왕의 실록과 왕실 족보의 한 질을 이곳에 보관케 했다. 그리고 월항면의 시진산 아래에 대왕의 18왕자와 세손의 태장지를 만들도록 했다. 태실의 설치공사는 세종 20년(1438년)에서 동왕 24년(1442년)까지 계속됐는데, 이우의 한개마을 이주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우가 한개마을을 새로운 거처지로 지목한 것은 세종이 만든 태장지에 가깝다는 것을 들 수 있겠지만, 일각에서는 풍수를 아는 당대의 지관의 말에 이끌려서였다고 전해진다.

한개마을에서는 광해조 이후에 9명의 대과 급제자를 배출했고, 소과급제자는 24명에 이를 정도였다. 한개마을에서 처음 과거에 급제한 인물은 광해군 4년(1612년)에 문과식년시에 합격한 월봉 이정현(1587~1612년)이었다. 월봉은 약관에 한강 정구의 문화에서 학문을 익혔고, 과거에 올라 홍문정자에 보임됐으나 2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한강 선생은 "일찍이 보았네, 젊은이들 가운데 아름다운 기상으로 애써 노력하는 것을 학업을 연마하고 과거에 급제하고, 몸가짐 올바르기가 으뜸이었네"라고 애도했다.

월봉의 아들인 한포 이수성(1610~1672년)은 완석정, 이언영의 문인이며 형조참의에 증직됐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우봉이씨의 가르침으로 인재가 됐으니 당시 사람들은 "맹모의 삼천지교에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이수성의 2자인 이달우(1629~1692년)는 청천당 장응일의 문인으로 숙종 12년(1686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됐으며, 한포공의 4자인 이달운(1637~1695년)은 숙종 9년(1683년)에 생원이 됐다. 이후 한개마을의 인물로는 시조공의 25세손인 이석오, 이석문, 이석구를 꼽을 수 있다.

특히 북비공으로 더 잘 알려진 돈재 이석문(1713~1773년)은 영조 15년(1739년)에 권무과에 급제해 선전관이 됐으며, 이후 사도세자가 대리서정하던 때에 다시 무신 겸 선전관으로 발탁됐다가 의금부도사가 됐다. 그 후 영조 38년(1762년)에 공의 나이 50세로 다시 무겸을 제수 받아 봉직하던 중에 마침 영조가 세자를 죽이고자 휘녕전으로 갔는데, 어가를 배중했던 이석문은 뒤주 속에 갇힌 세자를 구하려고 세손을 업고 어전에 나아가 뒤주에 돌을 들어 놓으라는 어명을 끝내 거절했다. 결국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낙향했다. 고향에 돌아온 이석문은 출입문을 북쪽으로 옮기고 사도세자를 추모했다.

이후 한개마을의 인물로는 응와 이원조(1792~1871)에 이르러 절정을 이뤘다. 응와공은 순조 9년(1809년)에 전시문과에 급제했으며, 대사간, 도총부부총관, 병조참판, 공조판서에 임명됐다.

한개마을을 빛낸 또 다른 인물로는 한주 이진상(1818~1886)을 들 수 있다. 헌종 15년(1849년)에 소과에 합격해 성균관 생원이 됐으나, 대과는 포기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반대운동을 벌였으며, 한주공의 학문은 '심즉리설(心卽理說)'로 대표되며, 많은 인재를 양성해 공의 문인록에 이름을 올린 자가 면우 곽종석을 비롯해 137명에 이르러 '한주학파'로 분류하고 있다.

한주의 아들인 이승희(1847~1916년)는 가학을 계승해 당대의 대유가 됐다. 그는 을사조약이 알려지자 5적신의 참형과 조약의 파기를 촉구하는 상소를 올려 대구감옥에 투옥됐으며,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이상설과 함께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했다. 이후 각지를 순회하며 조국의 독립을 역설하다가 봉천에서 병사했다.

북비고택을 지키고 있는 성산이씨 종손 이수학씨는 "인생은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것이라기보다는 두 손을 맞잡고 왔다가(拱手來) 내 사명을 다함에 소홀함이 없었는지 두렵고 아쉬운 마음으로 두 손을 맞잡고 돌아가는 것(拱手去)"이라며 "개천에서 용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선조들의 엄한 교육과 지극한 정성이 토대가 돼 그 같은 인물을 배출할 수 있었다는 것. 아무런 노력 없이 요행으로 가문의 명예를 높일 수 있는 인물을 낳을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는 또 "한개마을을 찾아오는 분들이 고택 등 외양을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선조들의 훌륭한 정신을 많이 배우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한개마을에서 배출된 훌륭한 인물들이 많다. 이와 관련해 모르고 있는 분들도 많은 만큼 이를 스토리텔링해 지역 문화재를 알리는 것도 관광마케팅의 방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
3편에서는 한개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현재의 생활에 불편함은 없는지 이를 해소하기 위해 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정비사업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취재2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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