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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역사인물 '배설' 그를 재조명하다 1회

임호동 기자 입력 2016.05.03 09:56 수정 2016.05.03 09:56

임진왜란시 성주성 수복의 선봉
진주 백성들은 거사비까지 세워줘
어디에도 알려지지 않은 공적들

게재순서
1회 : 임진왜란과 배설
2회 : 배설과 칠천량 전투
3회 : 배설과 이순신
4회 : 배설의 최후
5회 : 영화 '명량'과 배설

예로부터 성주군은 걸출한 인물들이 많은 고장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왜곡된 진실로 오명을 쓰고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배설 장군이다. 배설은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공을 세웠고, 특히 경상우수사로서 많은 전투에서 선봉으로 활약한 장군이다. 그러나 그의 평가는 사실과 달리 크게 엇갈린다. 이순신 장군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배설은 비겁자로 다뤄지기 일수다. 특히 영화 '명량'에서는 이순신 장군에게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암살계획을 세우는 악인으로 묘사된다. 이에 이번 취재를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배설이란 인물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 경북 성주군 대가면 명천리 수름재에 소재한 배설 장군 묘소
ⓒ 성주신문
서강 배설에 대해서는 예상외로 알려진 것이 없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춰진 배설 장군의 모습을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의 발자취를 쫓다보면 이런 평가에 의문이 생긴다.
 
배설은 1583년(선조 16년) 무과별시에 급제해 변방 방어활동에 주력했다. 그러던 중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방어사 조경을 따라 남쪽으로 출정하게 됐고 황간, 추풍령 등지에서 격전했으나, 왜군의 전투력에 밀려 패하게 된다.
 
이후 배설은 향병을 규합해 왜적과 대항했으며 초유사 김성일의 가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던 배설이 두각을 나타낸 것은 의병장인 아버지 배덕문을 도와 성주를 수복하면서다.
 
배설의 가문은 3대가 왜란에 참전한 호국 가문이다. 배설의 아버지인 배덕문은 68세의 나이로 성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또한 동생 배즙은 배설을 따라 칠천량 전투에 참전했으며 노량해전에서 전사했고, 배설의 아들인 배상룡도 의병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김해에 상륙한 흑전구침(黑田句沈)은 거창, 고령을 거쳐 음력 4월 27일 성주목사 제말을 죽이고 성주를 점령한다.
 
이에 배설의 아버지인 배덕문은 68세의 나이로 의병을 일으켜 성주성을 수복한다. 이때 배설은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를 도와 용맹을 떨쳤다.
 
↑↑ 흑전구침을 베었다는 부상진의 현재 모습
ⓒ 성주신문
특히 부상진(현 초전~김천 방면)전투에서는 흑전구침의 목을 벴으며, 개산진(현 김천 개령)에서는 적장 평의지(平義智)를 격파하고, 무계진까지 출정해 적을 완전히 평정하는 공을 세웠다.
 
이 승리로 경상우도 낙동강 서쪽 지역이 수복되면서 왜군은 육상 보급로 하나가 차단되는 피해를 입게 된다.
 
배설 장군은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1593년 행재소(行在所: 임금이 임시로 머문 곳)로부터 합천군수를 제수 받았다.

이후 왜적이 부산포 일대에서 소란을 피우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부산첨사를 거쳐 동래부사로 발령받는다.
 
배설은 부산첨사로 활약하며 왜군의 국경 왕래를 차단했고, 동래부사 때는 관할 구역을 임진왜란 전과 같이 평온하게 유지하는 실적을 남긴다.
 
↑↑ 배설 장군의 공적을 기리는 거사비가 세워졌던 진주성
ⓒ 성주신문
부산의 민심을 수습한 배설은 진주목사에 제수돼 진주로 향한다. 진주목사가 된 배설은 지역민들에게 덕을 베풀고 바른 정사로 고을을 평안하게 해 진주 백성들의 민심을 사며 덕망을 쌓는다.
 
조선실록의 기록을 보면 배설을 향한 진주백성들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남해안이 왜적의 발호로 소란해지자 우의정 류성룡은 배설을 경상도 수군절도사로 천거했으나, 진주 백성들이 배설의 전출을 막아 한 달이 지체되고 만다. 또한 진주 백성들은 배설이 떠난 뒤 배설을 기리기 위해 진주거사비를 세웠다.
 
성산 배씨 진사공파 29세손 배재관씨는 "진주 백성들이 세운 진주거사비는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인에 의해 훼손됐다"며 "일본이 임진왜란 당시 적장을 죽이고 왜군을 괴롭힌 배설 장군의 공적을 훼손하기 위해 벌인 일"이라고 전했다.
 
1595년 배설은 경상도수군절도사 겸 부원수로 발령받아 병사들과 숙식을 같이하며, 군을 정비하는 등 군의 사기를 높이고자 노력했다. 류성룡과 이원익은 이에 깊이 감명해 '나라의 간성'이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이러한 배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배설이 군 조직의 폐단과 시국을 논하는 건의문을 올렸고, 이를 권율 장군이 문제 삼으면서 밀양부사로 좌천된 것이다.
 
↑↑ 배설 장군이 선산부사 시절 중수한 금오산성
ⓒ 성주신문
이어 선산부사로 전출된 배설은 이러한 수모 속에서도 나라를 위해 업적을 남긴다. 바로 금오산성을 중수한 것이다.
 
배설은 그동안 방치됐던 금오산성을 정비하고, 오랜 농성을 위해 9정7택(9개의 우물과 7개 못)을 팠으며, 백성과 군사를 위한 양식 저장창고 혜창을 건설했다.
 
배설이 중수한 금오산성은 왜군의 북진을 막고 왜란 7년을 종식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병자호란 이후에는 3천500명의 병력이 상주하는 군사적 요충지로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된다.
 
배설 장군의 이러한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기록들이 많이 누락됐기 때문이다.
 
↑↑ 배설 장군이 축성한 금오산성 축성 표석
ⓒ 성주신문
실제 금오산성 표지판 어디에도 배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금오산성의 대혜폭포 아래 바위에는 '善山府使 裵楔 築 金烏山城 穿 九井七澤(선산부사 배설 축 금오산성 천 구정칠택)이라고 세긴 글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금오산성 어디에도 배설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단 칠곡문화대전에서만 이런 사실을 전하고 있다.
 
이런 평가는 미디어나 매체에서 노출된 배설 장군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발생한 현상들로 볼 수 있다.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나 영화 '명량' 같은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매체에서 배설 장군은 전쟁이 무서워 도망치는 비겁자로 그려진다.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공을 세운 배설 장군이지만 그 공에 대한 언급은 없다.

↑↑ 경북 구미시 금오산 입구에 세워진 금오산성 사적비
ⓒ 성주신문
배재관씨는 "역사기록으로 살펴봐도 배설 장군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나라를 위해 싸워 온 분"이라며 "하지만 왜곡된 시선을 가지고 공적을을 인정하지 않으며, 왜곡된 사실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아 가슴아프다"고 말했다.

이에 다음 편에서는 배설의 평가를 엇갈리게 한 정유재란과 칠천량 전투 당시의 배설 장군의 기록을 살펴보고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취재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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