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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역사인물 '배설' 그를 재조명하다 2회

임호동 기자 입력 2016.05.17 16:53 수정 2016.05.25 04:53

항상 선봉에 섰던 배설 장군
칠천량 후퇴 후 백성을 구하다
배설이 살린 12척, '명량'의 주력선

게재순서
1회 : 임진왜란과 배설
2회 : 배설과 칠천량 전투
3회 : 배설과 이순신
4회 : 배설의 최후
5회 : 영화 '명량'과 배설

흔히 살다보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나게 된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와 함께 성주를 수복하고 동래부사, 부산첨사, 진주목사를 역임했으며, 금오산성을 중수해 왜군의 북진을 막는 공을 세운 배설 장군도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맞는다. 바로 칠천량 전투이다. 1597년(선조30)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배설 장군은 정유재란을 겪게 되고, 조선수군이 패망하는 칠천량 전투의 선봉에 서 있었다. 이번 회에서는 칠천량 전투 당시 상황과 배설 장군의 숨은 이야기를 조명하고자 한다.【편집자주】

↑↑ 조선 수군이 대패했던 칠천량의 현재 모습(경남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와 어온리 사이 해협)
ⓒ 성주신문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25)부터 1598년(선조31)까지 일본이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하며 발발한 전쟁이다. 임진왜란 중 연전연승을 거두던 일본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 및 의병의 활약에 이어 명나라가 참전하면서 불리해지자 회담을 신청한다. 이때 휴전이 잠시 이뤄졌으나 일본은 강화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597년(선조30) 1월 선단 600여척과 14만명의 병력을 재정비해 부산포를 침범했다. 정유재란이 발발한 것이다.
 
일본이 재침범하자 선조는 이순신에게 바다로 나가 일본 수군을 위협할 것을 명령했으나 이순신 장군은 출정을 거부한다. 당시 일본군은 부산에 왜성을 쌓고 조선 수군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상황으로 먼저 나가 싸우는 것은 불리한 상황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빌미로 1597년 2월 26일 이순신 장군이 체포돼 압송되고, 원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됐다. 이때 부산 첨사 및 동래부사를 역임한 바 있던 배설 장군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된다.
 
원균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과의 갈등으로 경상우수사에서 해임된 바 있다. 그러나 원균은 매번 이순신에 대한 질책과 선조의 생각과 같이 조선 수군이 나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에 선조는 원균을 적임자로 판단했고, 이순신의 뒤를 잇는 수군통제사로 임명한 것이다.
 
그러나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도 이순신의 판단이 옳았던 것을 알게된다. 이에 원균은 도원수 권율에게 수군과 육군이 함께 싸울 것을 주장하지만 거절당했고, 오히려 출정을 미룬다는 이유로 권율에게 곤장을 맞는 사건이 발발한다.
 
이 사건 이후 원균은 무모한 출정을 시작하게 된다. 한산도 본영을 출발한 조선 수군은 견내량, 칠전도, 영등포, 가덕도를 거쳐 다대포까지 이르게 된다. 부산 첨사 및 동래 부사를 역임하면서 부산포와 다대포 등 부산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었던 배설장군은 이 출정에 선봉을 맡게 된다.
 
칠천량 전투는 명실상부한 패전으로 그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일본의 정한위략이나 당시 전쟁에 참여한 김완의 해소실기, 선전관으로 참전한 김식의 보고(조선왕조실록) 등으로 싸움을 유추해볼 수 있다.
 
당시 일본은 조선 수군의 출정로에 따라 연락원을 배치해 조선수군을 정탐하고 있었다. 일본은 원거리 진군을 하는 조선 수군을 지치게 할 목적으로 교전을 피하며 유인책을 펼친다.
 
1차 출정에서 배설은 다대포 앞바다에서 왜선 8척을 전소시키고 군량미를 뺏는 전공을 올린다. 이는 수군의 부산 출정의 유일한 선전으로 기록된다.
 
하지만 배설의 초기 선전과 달리 왜군의 위장전술과 기만전술에 빠진 조선 수군은 악천후까지 겹치며 다대포 전투에서 전선 13척을 잃고 거제도로 퇴각한다. 1차 출정에 패배에도 불구하고 부산포 해전을 결심한 원균은 출전에 앞서 작전회의를 갖는다. 이때 배설은 "다천(茶川)은 수심이 얕아 싸움에 불리하고 패할 확률이 크다"고 만류했으나 원균은 이를 묵살하고 야간 기습에 들어간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왜적의 매복 작전으로 인해 가덕도에서만 400여명의 수군이 전사했으며, 전선 20척을 잃는 피해를 입는다.
 
1597년 7월 14일 칠전도까지 후퇴한 원균은 칠천량 전투를 앞두고 작전회의를 갖는다. 다시 배설은 "칠전도는 물이 얕고 협착해 판옥선을 운영하기 힘드니 함대를 한산도로 옮길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원균은 이번에도 배설 장군의 의견을 묵살한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다음날인 1597년 7월 15일 14만여명의 군사가 부산으로 입항해 남해안을 장악한 일본군은 600여척의 선단으로 조선 수군을 3~4중으로 포위하고 야간 기습을 가했다. 당시 전쟁에 참여했던 김완이 적은 해소실기에 따르면 일본의 야습에 두 번의 패전을 당한 조선 수군은 우왕좌왕하며 도망치기 바빴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전투로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병사 최호가 전사하고, 조방장 김완이 포로로 잡혔으며, 전선 160척이 불타고 1만여명이 넘는 조선 수군이 전멸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에 기록되고 있다. 칠천량전투에 선전관으로 참전한 김식은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고성 지역 추원포로 후퇴했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해 마침내 우리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다. 뭍으로 원균과 함께 후퇴했으나 원균의 생사는 알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이와 같은 패전 상황에서 배설 장군은 8척과 조선 수군 1천여명과 함께 퇴각한다. 논란은 여기서 나타난다. 일부 문건에선 이런 배설 장군의 퇴각을 도망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조실록(1597, 만력25) 7월 1일(경인)에 '적이 수군을 습격하여 깨뜨렸다. 통제사 원균이 패해 죽고 전라 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등이 죽었으며, 경상 우수사 배설은 도망해 죽음을 면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배윤호 성산배씨종친회 대변인은 "당시 조선수군은 삼도수군통제사에게 군권이 집중되는 일을 막기 위해 경상수사, 전라수사, 충청수사까지 총 4개로 나눠 편제돼 있었다"며 "경상우수사였던 배설장군의 휘하에도 적어도 30척의 전선이 존재했을 것인데 살아남은 배는 8척뿐이다. 만약 도망을 쳤더라면 보다 많은 배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부산첨사와 동래목사를 지낸 배설 장군은 경상우수사로서 그 지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8척이라도 구해낼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실제로 퇴각 이후 배설의 행적을 보면 단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칠천량을 빠져나온 배설은 조선수군의 본영인 한산도로 향한다. 칠천량에서 조선수군을 궤멸시킨 일본군은 조선 수군의 본영인 한산도를 향해 진군했다. 이에 앞서 사지에서 8척의 배를 살려낸 배설은 퇴각 이후 한산도에서 청야작전을 펼친다. 청야작전은 일본군에게 쓰일 수 있는 군량미나 군수물자를 소각하는 것을 말한다. 청야작전 이후 배설은 백성들을 안전하게 피난시킨다.
 
한산도에서 청야작전을 펼친 배설은 전라우수사 김억추와 함께 잔류 판옥선 4척을 회수해 12척의 군선으로 회룡포로 후퇴해 진을 치고 왜군의 침략에 대비함으로써 왜군의 서해 진출을 차단했다.
 
이런 기록은 조선실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선조30년 정유(1597, 만력25) 8월 5일(계해) 조정은 원균을 비롯한 패주한 장수들의 처벌 문제를 논의한다. 도체찰사 이원익은 칠천량전투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가다 패멸한 전쟁으로 보고하고, 주장 원균을 비롯한 모든 장군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을 주장한다. 하지만 배설 장군은 살아남은 배와 병사를 통솔하고 바다를 지키고 있으니 후일을 기다려 의논해 처리하는 것을 간한다.
 
임진왜란 당시 성주를 비롯해 진주, 부산 등에서 공을 세우고, 금오산성을 중수하는 공을 세운 배설은 칠천량 전투를 기점으로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전쟁에서 도망쳐나오는 비겁자 혹은 훗날을 위해 전력으로 12척의 배를 살리고 후퇴한 장수로 평가가 갈린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배설은 칠천량 전투가 있기 전 모든 해전에서 선봉을 섰으며, 칠천량 전투에서 12척의 배를 살리고 한산도 백성들을 구해냈다. 또한 훗날 배설이 살려낸 12척의 군선은 이순신 장군의 명량대첩의 주력선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 속에도 불구하고 배설 장군이 악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명량대첩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이에 다음 회에서는 명량대전 당시 배설의 행적과 함께 이순신과 배설의 관계를 재조명해 본다.  

취재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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