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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역사인물 '배설' 그를 재조명하다 3회

임호동 기자 입력 2016.05.24 16:52 수정 2016.05.25 04:52

병가인가? 탈영인가? 계속되는 논란
오락가락 하는 난중일기 속 배설
두 사람을 갈라놓은 명량대첩

게재순서
1회 : 임진왜란과 배설
2회 : 배설과 칠천량 전투
3회 : 배설과 이순신
4회 : 배설의 최후
5회 : 영화 '명량'과 배설

모든 일에는 인간 관계가 중요하다. 그리고 복잡한 여러 인간관계에서 사건·사고가 일어난다. 배설 장군은 칠천량에서 12척의 배를 살려냈고, 백의종군 하던 이순신 장군은 이 12척의 배로 명량대첩이라는 신화를 남긴다. 하지만 명량대첩 이후 이 둘의 평가는 달라진다. 이순신은 구국의 영웅으로, 이순신의 승리에 일조했다고 볼 수 있는 배설은 비겁자로 평가받는다. 실제 여러 곳에서 이순신과 배설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이순신과 배설은 칠천량 전투 이후 조선의 위기에 직면했던 인물들이다. 이번 회에서는 이순신과 배설의 관계를 살펴보고 명량대첩을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편집자주】

↑↑ 해전을 지휘하는 이순신(진도)과 울돌목을 보며 고뇌하는 이순신(해남). 명량대첩은 이순신 장군만 기억하고 있다.
ⓒ 성주신문
이순신 장군과 배설 장군은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괴멸한 이후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을 마주 하고 있었던 장수들이다. 하지만 한명은 구국의 영웅이 됐고, 다른 한명은 비겁자가 됐다.
 
칠천량 전투의 패전 이후 명령 불복종으로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은 권율의 휘하에서 칠천량 전투에 대한 패전 조사를 실시했다.
 
난중일기를 보면 정유년 7월 18일(양력 8월 30일) '16일 새벽에 수군이 몰래 기습 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여러 장수와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었다. 수군이 대패했다'고 기록했으며, 정유년 7월 21일(양력 9월 1일) '노량에 이르니 거제 현령 안위, 영등포 만호 조게종 등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고 울부짖었다. 대장인 원균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고, 여러 장수들이 뭍으로 가서 이 지경이 됐다. 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 없고, 그 살점을 씹어 먹고 싶다고 했다'고 난중일기는 전하고 있다.
 
이때부터 배설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정유년 7월 21일(양력 9월 1일) 이순신은 '경상우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했으나 다음날인 7월 22일 (양력 9월 3일) '경상수사 배설이 와서 보고, 원균이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 했다'고 난중일기에 기록돼 있다.
 
이에 성산배씨 종친회는 이의를 제기했다.
 
배윤호 종친회 대변인은 "당시 칠천량 패전의 책임은 원균이 사망한 시점에서 도원수인 권율이 져야하는 상황"이라며 "이때 권율은 백의종군 하던 이순신을 이용해 패전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고, 배설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 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당시 이순신은 백의종군의 몸으로 장수나 통제사가 아니었다. 모든 관직을 놓고 벌을 받는 병사의 몸인 이순신에게 경상우수사가 찾아가 보고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라며 "난중일기에서도 도망갔다고 주장한 다음날 배설이 찾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는 등 미심쩍인 부분이 많다"고 말했다.
 
칠천량 전투 이후 실의에 빠져있던 조정은 1597년 8월 류성룡의 천거에 따라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시킨다. 이때부터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는 배설에 대한 언급이 잦아진다.
 
이순신은 정유년 8월 3일 선전관 양호가 교유서를 전달해 삼군수도통제사로 임명됐다. 이후 12일과 13일 거제현령 안위와 발포만호 소계남이 이순신에게 인사를 하러 왔고, 배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순신은 배설이 겁먹은 것을 비난하며, 소재를 파악했다.
 
17일 장흥으로 간 이순신은 배설이 자신이 탈 배를 보내지 않았다는 불만을 기록했으며, 18일 회령포로 간 이순신은 배설이 멀미를 핑계로 보이지 않았다고 적었다. 그리고 19일 두 사람의 갈등이 표출된다.
 
난중일기를 살펴보면 정유년 8월 19일(양력 9월 29일) '여러 장수들이 교서에 숙배하는데 배설은 숙배하지 않았다'며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 하는 꼴은 말로 다할 수 없다. 배설의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고 전했다.
 
이 사건을 두고 배윤호 대변인은 "당시 이순신은 전라좌수사 겸 삼도수군통제사지만 백의종군하며 품계가 낮아져 배설이 굳이 숙배를 할 필요가 없었다"며 "함대가 필요한 이순신이 배설의 함대를 양도받기 위해 배설을 찾아왔고, 권력을 이용해 함대를 양도받기 위해 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임원빈 순천향대 이순신 연구소장은 "이순신 장군은 원래 무서우리 만큼 군율 집행에 엄격했다. 특히 칠천량 패전 이후 와해된 수군의 기강을 바로 잡고자 엄격하게 행을 집행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이는 배설 장군에게만 행해진 것이 아니라 수군을 한마음 한뜻이 되도록 뭉치기 위해 이뤄진 것"이라고 말했다.
 
수군재건에 가장 필요한 것은 함대였다. 이순신은 배설의 12척의 함대가 필요했다. 우여곡절 끝에 배설에게 12척의 배를 양도 받은 이순신은 다시 한 번 선조의 명을 불복한다. 선조는 조선 수군의 병력도 약하고 이길 가망이 없으니 육군에 합류할 것을 명령했다. 이때 이순신은 "전선이 아직도 12척이나 남아있다. 죽을힘을 다해 싸우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바다에서 싸울 것을 주장한다. 이때 배설은 수군의 세력이 약하니 조정의 뜻에 따라 육지에서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묵살당한다.
 
당시 배설은 몹시 불안한 상태였다. 난중일기에서 보면 배설은 계속 해전을 피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정유년 8월 28일 '적선 8척이 뜻하지 않게 들어왔는데 여러 배들이 두려워했고, 경상우수사 배설은 이를 피해 물러나려했다'고 한다.
 
그 당시의 이순신의 눈에는 배설이 겁을 집어먹은 겁쟁이로 보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지금의 시각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최근 종종 공포의 현장에서 탈출하거나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이 겪는 정신적 증후군이 있다. 바로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이다. 많은 사람들이 공포를 겪고 나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자해를 하거나 폭력성을 들어내곤 한다.
 
배설은 조선수군이 왜군에게 도륙당하던 곳에서 살아나온 장수다. 많은 동료를 잃었고, 사지를 도망쳐 나왔다. 수많은 전투에서 선봉에 섰던 배설이었지만 해전은 공포의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배설은 정유년 8월 30일(양력 10월 10일) 수질을 핑계로 몸조리를 하겠다는 공문을 보냈고, 이순신은 이를 허가한다. 우수영에서 뭍으로 내려간 것이다.
 
문제는 이후 난중일기에 기록된 단 한 줄이다. 이순신은 정유년 9월 2일(양력 10월 12일) '오늘 새벽에 경상수사 배설이 도망갔다'고 난중일기에 썼다. 이 기록으로 많은 사람들은 배설을 탈영병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로부터 2주 후인 1597년(선조 30년) 9월 16일 이순신은 울돌목에 진을 치고 왜선 133척과 맞선다. 그 유명한 명량대첩이 벌어진 것이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적선 31척을 깨트리고, 적장 구루지마 마시후사를 참하는 등의 전공을 세운다. 조선 수군은 단 1척의 피해도 입지 않았으며, 아군의 피해는 전사자 2명, 부상자 2명이 전부였다. 희생이 따랐지만 말 그대로 대승이었다. 죽을 각오로 싸운 이순신은 역사가 기억하는 승자가 됐고, 대승의 토대를 마련했지만 대승을 거둔 전투를 피한 배설은 도망자가 됐다.
 
앞서 살펴본 일화는 칠천량 이후의 이순신과 배설의 관계다. 이 기록들만 보면 배설에 대한 이순신의 악평이 많다. 하지만 칠천량 이전의 배설에 대한 이순신의 평가는 달랐다.
 
이순신과 배설은 류성룡이 천거한 동인의 사람들이었다. 소소한 불평과 불만까지 난중일기에 적었던 이순신이 배설에 대한 불만은 거의 없다. 오히려 이순신은 군 조직의 폐단을 간하는 건의문을 제출한 배설이 도원수 권율에게 책을 잡혀 좌천될 때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칠천량 패전 이후 위기의 조선수군이라는 조건에서 대처방안이 달랐던 두 사람의 선택이 지금의 평가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한다. 정유재란 후 조정이 배설을 역모로 체포해 참수한 것이다.
 
이 사건은 배설이라는 인물의 평가를 낮추는데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다음회에서는 배설의 최후를 살펴보고, 그가 사후 신원이 회복되는 과정을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취재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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