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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포커스초대석

"별고을 성주는 현재의 내가 있게 한 장본인입니다"

임호동 기자 입력 2016.05.24 09:41 수정 2016.05.24 09:41

ⓒ 성주신문
지난 4일 성주고에는 특별한 손님의 방문이 있었다. 주(駐) 러시아·일본 등 대사를 역임하면서 한국외교에 헌신한 김석규 前 대사(성주농고 6회)의 장학금 기증식 및 특별강연이 대강당에서 진행된 것이다. 이날 김석규 전 대사는 1억원의 장학금을 기탁하고, 자신의 인생을 녹인 특강을 통해 후배들에게 전달했다. 김 전 대사의 활동으로 성주고에는 성세장학금이 신설돼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더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에 앞서 본사는 지난 3일 김 전 대사를 만나 그의 인생과 삶의 철학, 성주의 의미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봤다.

■ 모교에 1억을 기부했다. 그 이유가 있다면?
 
모교에 장학금을 기탁하는 것은 내 인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였다. 지금 성주가 있었기에 내가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공직생활을 은퇴하고 내가 걸어온 발자취를 쫓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다. 나를 길러준 성주에도 여행을 왔다가 성주고를 보게됐다. 감회가 새로웠고, 후배들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이 일을 실행한 것이다. 칭찬받거나 누구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내가 기탁한 장학금으로 후배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하길 바랄 뿐이다.
 
■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그 당시를 회고해 달라.
 
외가인 영주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생활하다가 아버지가 사업을 하던 만주에서 생활했다. 1944년 다시 국내로 와 청계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을 다녔다. 하지만 5~6학년때 부모를 연이어 여의고 고아가 됐다. 경기중 1학년을 마치고 친척들을 찾아 청도와 대구를 전전하다 1951년 성주를 찾게 됐다. 친할아버지와 동서지간이던 성주읍의 도문환 할아버지를 찾아 몸을 의탁한 것이다. 이후 도씨의 과수원에서 생활하며 사소한 일을 도왔다.
 
과수원에서 생활하며 성주중의 피난학생으로 등록해 청강생으로 중학교 3학년을 몇 개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청강생이었던 나는 졸업장을 받지 못했다. 성주중 제7회 졸업식 날, 학교 뒷산에 홀로 앉아 졸업식 노래를 들으며 홀로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성주읍의 삼일정미소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나는 인부들의 조수 노릇을 했다. 참 공부가 하고 싶었던 시절이었다. 정미소가 중학교와 고등학교 사이에 있어 매일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며 부러워했다.
 
이후 정미소에서 성주양조장으로 보내졌다. 술거르는 일, 고두밥 말리는 일, 술 배달 등 양조장에서 잡일을 거들었다. 당시 임종용씨가 기독교 계통의 성광중과 성광고를 새로 만들어 운영하고 있었다. 양조장에는 술을 좋아하는 교사들이 자주 왔는데, 성광중 교사들이 김세훈 양조장 사장님을 설득해 나를 성광고 2학년으로 입학시켜줬다.
 
참 하루하루 힘들었지만 즐거운 일도 많았고, 서울로 올라가겠다는 꿈을 잃지 않던 유년시절이었다.
 
■ 학구열이 남달랐다. 어려운 여건에서 어떻게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나?
 
성광고 2학년 재학 당시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학생들이 많았다. 중학교를 제대로 못나왔거나 사정이 어려워 학업을 지속하지 못했던 학생들이 많이 구제받았다.
 
당시 교사들도 경험이나 경력이 부족한 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열성적으로 우리를 가르쳤고, 나도 하나라도 더 배우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성광고 3학년 때 대학진학을 위해 성주농고로 학교를 옮겼다. 중학교 졸업장도 없던 나를 받아준 성광고였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 하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내 인생에 정말 고마웠던 학교를 등지고 내린 선택이었기에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는 과외나 학원도 없었다. 교과서와 참고서를 외우다시피했다.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선택했는데 참고서로 독학하고 성당의 독일 신부를 만나 지도받았다. 공부방이 따로 있었던 것도 아니라 양조장의 구석지고 조용한 곳이 나의 공부방이었다.
 
양조장에서도 많이 배려해줬다. 함께 일하던 일꾼들도 공부를 하라며 일을 많이 도와줬다.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어 고등학생으로 생활할 수 있었다.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했고, 서울대 문리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 외무고시에 도전하게 된 이유와 합격을 위해 어떻게 공부했는지?
 
대학교 1학년때 당시 친구였던 서석준 박사와 함께 고등고시를 합격해 34세의 나이로 성주군수에 부임한 남봉진 군수를 찾아갔다. 남 군수는 갑작스레 찾아온 우리를 반겨주며, "가난한 현실을 극복하고,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고등고시를 목표로 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도전하게 됐다.

서울에서 시작된 나의 대학생활은 화려한 대학생과 거리가 멀었다. 경제적 여건이 따라주지 않다 보니 정말 힘들었다. 생활비를 과외를 하며 벌어서 써야했고, 영양실조를 달고 살았다.  
대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공부를 병행하며 준비한 외무고시 준비는 더더욱 힘겨웠다. 동대문 시장에서 헌책을 사서 공부했고, 서석준 박사를 비롯한 친구들의 책을 물려받으면서 공부했다. 딱 5개월 준비를 하고 외무고시를 도전했다.
 
당시 친구들은 5개월을 준비하고 고등고시 합격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절실했다. 두 번을 준비할 경제적 여유도 없었고, 공부할 여건도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 절실함이 통했는지 서석준 박사와 함께 1959년 11월 11일 제11회 고등고시 행정과 제3부 외교관 시험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면접을 거쳐 1959년 12월 12일 최종 합격했다. 대학교 3학년 재학중에 이뤄낸 성과였다.
 
■ 공직시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무엇인가?
 
멕시코, 파라과이 등 해외에서 외교관으로 보낸 모든 일화가 기억에 남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러시아 대사관 시절에 있었던 ‘현대전자 연수원 피랍사건’이다,
 
1995년 10월 14일 현대전자 해외 연수단이 탄 버스가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피랍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는 1차 체첸사태로 인해 인질극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보고를 받고 외투도 걸치지 못한채 바로 현장으로 나갔다. 루쉬코프 시장은 장기전으로 갈 수 있으니 추위대비부터 시켰다. 루쉬코프 시장을 만났을 때 러시아가 무력진압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절대 우리 국민이 다치는 일이 없도록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인질은 한국인 26명과 러시아인 운전사 1명을 인질로 잡고 100만 달러와 비행기를 요구했다. 러시아는 주말을 핑계로 돈을 모으고 있다며 여러번에 나눠 돈을 지급하며 교섭을 시도했다. 현금을 전달할 때 마다 인질 일부를 석방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때 현대전자 연수원들은 서로 먼저 나가라며 한국인의 긍지를 보였다.
 
당시 새벽 2시 45분경, 진압작전이 시작됐다. 교섭 경찰이 범인에게 현금을 건내는 순간 특수부대가 버스로 침투했다.
 
특수부대원 한명이 유리창을 깨고 버스로 들어가며, 연막탄을 터뜨리고 '엎드려'라는 말을 외쳤다. 그 말을 알아들은 연수원들은 모두 엎드렸지만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인질범은 결국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진압작전은 21초만에 끝났고 사건 발생 9시간만에 전원 무사구출 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언론에서 주목했던 만큼 우리나라 언론도 일제히 안도와 찬사를 보냈다. 그제서야 나도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또한 연수생 대표 박연수 단장의 감사서한을 받았을 때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 인생철학이나 좌우명은?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생활신조이다. 오늘이 있어야 내일이 있다. 현재에 얼마나 충실히 노력하는가에 따라 내일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평 불만하지 말고,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현실은 어려움을 주면서도 항상 출구도 함께 숨겨놓는다. 하지만 그 출구는 노력을 해야만 찾을 수 있다. 현실에 충실하고 꾸준히 노력해 항상 발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철학이다.
 
■ 평소 여가생활은 어떻게 보내며, 취미와 특기는?
 
건강한 몸이 있어야 올바른 생각과 더 나은 미래를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있다. 특히 걷기와 골프를 좋아한다.
 
와이프가 병사로 곁을 떠나고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의 주제는 내 인생을 돌아보는 것이다.
 
성주고를 방문한 것도 여행을 시작하면서 이뤄진 것이다. 성주를 방문해 즐거웠던 추억과 힘겨웠던 시절이 떠올랐고, 나처럼 어려운 환경에 힘든 학생이 있다면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이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한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을 비롯해 외교관 생활을 한 모든 곳을 방문할 예정이다.
 
■ 군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먼저 학생들에게는 자부심을 가지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성주는 작지만 자랑스런 곳이다. 성주가 없었다면 현재의 우리는 없다. 늘 성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오늘을 키우고 내일을 바라보자.
 
다음으로 군민분들에게는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성주는 오갈 곳 없던 나를 받아줬으며, 가진 것 없던 나를 키워준 곳이다. 이제는 내가 조금씩 갚아나갈 것이다.
 
성주는 내 맘속에 크게 자리잡고 있다. 다시 한번 성주를 지켜주시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군민 여러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김석규 △1936년 영주 출생 △성주농고·서울대 문리학과 졸업 △제 11회 고등고시 행정과 제3부 합격 △주 파라과이·이탈리아·러시아·일본 대사, 외교통상부 본부대사, 한양대·인하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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