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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역사인물 '배설' 그를 재조명하다 4회

임호동 기자 입력 2016.05.31 09:23 수정 2016.05.31 09:23

조정이 죽이고, 조정이 신원 회복
역적 누명 쓰고 참형됐으나
진정한 신원 회복은 아직 안돼

게재순서
1회 : 임진왜란과 배설
2회 : 배설과 칠천량 전투
3회 : 배설과 이순신
4회 : 배설의 최후
5회 : 영화 '명량'과 배설

명량대첩의 토대를 마련한 배설 장군은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병을 핑계로 놓치고 귀향한다. 전쟁터를 벗어난 그의 삶은 평탄치가 못했다. 배설은 칠천량 패전의 책임과 반역 모의라는 모함에 빠져 1599년(선조 32) 3월 6일 참형을 당한다. 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칠천량에서 12척의 배를 살린 배설로서는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그 죽음의 뒤에는 조정이 있었다. 이번 회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보여온 조정의 모습과 배설의 죽음을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편집자주】

↑↑ 노량해전 이후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투구와 갑옷으로 대신한 경북 고령군 덕곡면에 소재한 배즙의 묘
ⓒ 성주신문
정유재란은 1598년(선조 31) 11월 19일 노량해전을 끝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정유재란 중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로 인해 철군하게 된다. 이순신 장군과 명 수군제독인 진린은 함께 퇴로를 막기로 한다.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박멸하고자 했던 이순신은 고니시 군의 500여척의 전선중 100여척을 사로잡고 350척을 격퇴한다.

도망가는 왜군을 쫓아 관음포에 다다른 이순신은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고 만다. 조선을 구한 영웅이 정유재란 마지막 전투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이 전투에서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을 비롯해 배설 장군의 막내 동생인 배즙도 전사한다. 일본의 피해는 더 컸다. 고니시군은 500여척 중 고작 50여척만 살아서 도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영웅의 죽음에 모두가 슬퍼했다. 하지만 한명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바로 선조다. 임진왜란의 가장 큰 책임자는 선조와 조정에 있다. 선조는 이이의 10만양병설을 놓쳤고 조정은 당파싸움에 빠져 일본의 정세를 살피고 온 조선통신사의 보고를 허위로 보고하는 등 대비책을 놓쳤다. 특히 전쟁 발발 이후에도 동인 서인으로 나눠 인사 싸움에 빠져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그런 선조는 백성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했고, 이몽학의 난이 발발한다. 의병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킨 이몽학이 그 칼끝을 왜군이 아닌 조정으로 돌린다. 이런 이몽학의 난은 선조에게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의병장과 백성들의 신망을 키운 장수에 대한 의심과 질투의 원인이 됐다.

실제 선조는 의병총사령관 김덕령과 의병장 최담령을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처단했으며, 홀로 연전연승하는 이순신을 명령불복종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하려 했다. 선조의 이런 마음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잘 나타난다. 전쟁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헌신했던 자들이 모두 축출됐거나 평가절하 당했다.

이순신이 전사하던 날 류성룡은 탄핵됐으며, 도원수 권율은 노환을 핑계로 관직을 내려놓고 하야했다. 곽재우, 김면, 조헌 등의 의병장을 공신으로 책봉하지 않았고, 이순신도 1등 공신이 아닌 2등 공신으로 책봉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았다면 배설과 비슷한 죽음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우고, 칠천량에서 12척의 배를 구해냈던 배설은 전쟁이 끝나고 참형을 당했다.

1598년(선조 31년) 12월 23일 명군이 철수하자 병조판서 홍여순은 선조에게 배설을 처단할 것을 청한다.
 
홍여순은 "해상의 왜적은 이미 물러갔으나, 명군이 철수해 돌아간 뒤 국내의 변란이 일어날까 극히 우려됨으로 환란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며 "소문에 의하면 배설이 나주에서 도망해 충청도에 와 있는데 무뢰배들을 모으고 있다. 그 행적이 드러났지만 사람들이 화를 당할까 감히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를 명분으로 선조는 배설을 전국에 수배할 것을 결정했고, 조정은 배설을 비롯해 아버지인 의병제독 배덕문과 아들 배상룡을 체포한다. 그리고 1599년(선조32년) 3월 6일 선조는 배설에게 칠천량 패전에 대한 책임과 모반죄를 덧씌워 처형당한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를 두고 성산배씨종친회 배윤호 대변인은 "조정은 민란 등을 예방해 정권을 안정화하고, 전쟁의 책임을 전가시킬 장수가 필요했다"며 "그 과정에서 배설 장군이 조정의 의도에 딱 맞는 장수였다. 지역에서 신망을 받고 있으며, 칠천량 패전 당시 참전한 장수였기 때문이다. 군을 이탈한지 1년6개월만에 모반죄로 조정의 모함에 빠져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조정의 모함이라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배설은 참형을 면치 못했지만 아버지인 배덕문과 아들 배상룡은 무죄 석방됐다. 그 과정에서 배덕문은 배덕룡으로, 배상룡은 배상충으로 한글자씩 틀리게 기록했다"며 "그 이유는 조정이 배설을 처단함에 있어 정당성이 없었음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배설이 역모의 죄를 받아 참형을 당하자 경상감사 한준겸은 장지를 마련하고, 호상군을 보내는 등 배설의 장례를 치러준다. 당시 한준겸은 파직의 위험을 무릅쓰고 역적의 몸이 된 배설의 장례를 위해 움직였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또한 배설의 신원은 그가 죽음을 당한 6년만에 회복된다. 1605년(선조 38년) 임진왜란의 공신을 재평가할 때 배설은 선무원종 1등공신으로 녹권에 임명됐으며, 1610년(광해 2년)에는 가선대부 호조참판으로 상승됐다.
 
이는 배설의 참형이 옳지 않았음을 조정이 인정한 것과 같다. 배설은 선조가 참형을 명하고, 선조가 신원을 회복해준 경우다. 이런 경우는 조선사에 있어 극히 드문 사례이다. 모반죄로 참형된 자가 불과 6년만에 신원이 회복된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에서 모반죄로 참형된 의병총사령관 김덕령은 신원이 회복되는데 70년이 걸렸다.
 
↑↑ 배덕문·배설의 신도비, 배건·배상룡·배상호 등의 유허비 등이 있는 대가면 도남1리에 소재한 숭조대
ⓒ 성주신문
이에 멈추지 않고 배설의 신원은 계속해서 올라간다. 1873년(고종 10), 경상북도 내 유림들이 배설에 대해 상소해 고종은 배설을 자헌대부 병조판서겸지의금부훈련원사에 증직했으며, 도정(관원들의 성적을 평가해 승진이나 면직을 담당하던 관리)이 분향문을 지어 장군의 원혼을 달랬다.
 
배씨종친회 관계자는 "배설 장군이 신원회복을 하는 과정을 보면 조정이 명백히 잘못을 인정하고 있다"며 "이는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생각나는 부분으로 배설 장군의 노고와 공적을 조정이 인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배씨종친회의 말대로 배설이 죽은 후 일은 사필귀정으로 흘러갔다. 배설을 모함한 홍여순은 1600년 삭탈관직 돼 1608년 유배지인 진도에서 무뢰배들에게 맞아 죽었다. 그의 모함으로 죽음을 맞이한 배설은 병조판서까지 신원됐다.
 
이렇게 조정이 배설을 인정하고 신원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배설은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는 확실히 배설이란 인물에 대해 자세히 고증되지 않은 일부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의 매체에서 다뤄진 배설의 모습 때문이다.
 
이에 다음 회에서는 매체에서 다뤄진 배설의 모습과 사자 명예훼손으로 법정공방까지 펼치고 있는 배설 장군의 후손들에 대해 재조명해보고자 한다.
 
취재1팀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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