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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러운 성주인 '백농 최규동' (1회)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6.10.05 09:49 수정 2016.10.05 09:49

육영 위해 몸바친 민족교육의 선구자
전국 교육자들의 지침서 '새교육' 발간

게재순서
■ 1회 | 백농 최규동은 누구인가
□ 2회 | 성장기의 백농 선생과 교육이념
□ 3회 | 백농에 대한 일화 및 위대한 발자취
□ 4회 | 백농 선생을 기리기 위한 지자체의 움직임
□ 5회 | 딸에게 듣는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서울대 4대총장 백농 최규동

 최규동 선생의 호는 백농, 본관은 영천, 최무선의 후손 영한의 장남으로 1882년(고종 19년) 가천면 창천동에서 태어나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에 납치돼 평양감옥에서 그해 10월 향년 69세로 옥사했다.

 최근 전국의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현창사업을 통해 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기리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본지는 일제 강점기에 헌신적 교육자이자 민족계몽의 선구자로 평생을 청빈하게 육영에 전념하며 독립을 위해 민족교육의 선두에 섰던 백농 선생에 대한 심층취재를 통해 청소년을 비롯한 지역주민에게 성주인의 자부심과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우고, 애향심 고취의 계기를 마련코자 한다. 【편집자 주】

 지역에서 백농 최규동 선생을 제대로 알고 있는 주민들은 그리 많지 않다.

 최규동(崔奎東, 1882~1950) 선생의 호는 백농, 본관은 영천이며 최무선의 후손 영한의 장남으로 1882년(고종 19년) 가천면 창천동에서 태어났다.

 1949년 1월 초대 국립 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해 우리나라의 최초, 최대의 국립종합대학교로서 지도자급 인재 배출을 위한 영재교육 전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기반을 닦았으며, 조선전기공업중학교를 설립, 과학기술교육에도 공헌했다.

 어릴 때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으로 일찍이 한학을 배운 백농은 8세에 석류나무를 보고 한시를 짓고, 10세에 이미 사서백가를 외우는 등 주위에서 신동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15~16세 때 그간 배워온 한학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선생은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상경해 광신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문을 배웠다.

 신·구지식을 탐구하기에 부단히 정진한 선생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곧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나라의 광복과 민족의 발전은 오직 과학교육에 있다고 생각해 그의 생애 전반은 나라를 잃지 않으려고 싸웠고, 후반은 나라를 도로 찾으려고 싸웠으며 입교(立敎), 구국(救國)), 제민(濟民) 정신이 중심 사상으로 자리잡고 있다.

↑↑ 가천면 창천리 광봉산에 소재한 백농의 묘원.
ⓒ 성주신문


 그의 나이 23세 때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인재를 배양하는 것만이 장차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민족적 신념으로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워 안창호, 조정환과 함께 교편을 잡았다.

 1909년 휘문, 기호, 융희, 중앙, 오성, 기명학교 등에서 후세 교육에 전념했으며, 특히 그의 전공과목인 수학 강의는 탁월해 '최대수(崔代數)'란 이름이 장안에 널리 퍼졌다. 그는 각 학교에서 매주 58시간씩 가르쳤으며, 대부분을 수학교육에 전념했다. 서울 종로 거리에 나가서까지 수학을 교육하려 했다고 전해진다.

 1918년 5월에는 중동학교를 설립, 교장이 돼 민족교육기관으로서 민족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민족의 앞날을 걸머질 인재 양성에 전력했다.

 이듬해인 1919년 2월,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 수학 신교과서를 지어 수리교육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으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육서심원을 편찬, 간행하는 데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많은 인사들이 정치에 대한 야망에 부풀어 교육계를 떠났지만 백농은 꿋꿋하게 교육계를 지키며 미군정 학무국 자문기관인 한국 교육위원회 조직에 일반 교육분야 대표위원으로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공헌했다.

 1947년 조선교육연합회가 결성되자 백농은 초대회장으로 선출되고 정기간행물 '새교육'을 발간해 전국의 교육자들이 새로운 교육사조의 이해와 폭넓은 지식 습득으로 산교육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영천최씨 종친회 관계자는 "이러한 휼륭한 업적을 가진 분이 친일파로 규정돼 지난해 교육부가 선정한 '이달의 스승'에서도 재심의가 이뤄져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일제강점기의 암울했던 시대적 상황상 불가항력적인 요인을 현세대가 어찌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 가천면 창천리 광봉산에 소재한 백농의 신도비. 월탄 박종화가 시문을 짓고 김충현이 썼다고 돼 있다.
ⓒ 성주신문


 그는 서울대학교 총장을 하는 동안 한국전쟁의 희생자가 된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고 그는 곧 납북돼 평양의 서평양인민학교에 수용됐다. 그곳에는 소설가 이광수, 한국학의 정인보도 함께 수감돼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때르면, 8월 10일 평양에 도착한 이들 가운데 정인보 등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10월 16일 밤 심하게 내리는 빗속에서 내무서원들의 집중 총탄세례에 최규동과 이광수는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향년 69세였다.

 1965년에 그의 고향인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 광봉산에 '백농 선생 영천 최공 신도비'가 세워졌고, 서울 중동학교에는 1966년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1968년 정부는 평생을 청빈하게 육영에 전념하며 독립을 위해 민족교육의 선두에 섰던 선생에게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독립유공자로서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기획1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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