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살펴보면 어떤 운동에서 분수령이 형성될 때는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곤 했다. 현상타파 또는 현상변경을 요구하는 운동에서는 특히 자기 희생적인 사건을 통해 대중의 관심과 분노가 결집돼 역사적 돌파구가 마련되곤 했다. 합법적이고 순조로운 토론과 결정의 과정을 거쳐 역사발전의 다음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면 더 바람직한 일이 없겠지만, 이해관계의 날카로운 대립 속에서 힘있는 기득권층이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을 때는 불가피하게 파율적 행위가 요청되기도 했다. 그 행위는 물론 뒷날 정당성을 획득한다.
경제위기의 원인을 제공한 재벌과 관치경제를 주도했던 관료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줄타기를 해서 언제나 양지를 지향해 온 보수적인 지식인과 정치인들이 오히려 개혁의 주도세력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선 써먹기 좋은 행정능력이 있을 것이며, 대통령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눈치 빠르게 잘 전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 개혁과정에 참여하고 있을 뿐이며, 진심으로 개혁을 바라는 세력이 아니며,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개혁의 걸림돌이 되거나 좀 더 적극적인 개혁의 저항세력인 것이다. 그들은 개혁이 실패하면 책임지지 않을 것이고, 정권이 바뀌면 다음날로 등을 돌려서 과거를 단죄하는데 앞장설 사람들인 것이다.
역사적으로 개혁은 필요한 것인데도 성공하기보다는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조선조때만 보아도 조광조의 이상주의적 개혁이나 정조의 신학주의적 개혁, 그리고 대원군의 사정적 개혁이 공감대 형성 실패, 권력자의 외면 등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YS의 개혁도 인적청산에 그친 실패의 개혁으로 결론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일시적으로 기득권층의 저항과 대립으로 인한 부작용과 정치적 부담이 증폭되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과감한 개혁조치들을 단행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임기말 권력누수현상(lame duck)에 빠져 있다.
개혁이란 점진적일 수 없다. 개혁은 과거의 오랜 관행을 단절하는 급격한 변화이며, 따라서 이해당사자들의 갈등과 반발을 가져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모두를 함께 끌고 가는 개혁은 불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