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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득 균 스토리작가·동화작가 |
ⓒ 성주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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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9호에서 이어짐) 심산이 서울을 떠나 무사히 상해로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백세각은 가벼운 흥분에 휩싸였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일본 경찰이, 그가 성주를 떠날 때부터 곧장 미행을 따라붙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책상물림만이 아니었던 심산이 기지를 발휘해 일본경찰들을 교묘히 따돌렸음이 충분히 상상이 가고도 남는 대목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사랑에 나와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던 공산도 비로소 굳은 낯빛이 풀렸다.
"이제껏 우리에게 운이 따르지 않더니, 이제야 비로소 일이 제대로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인근이 흥분을 감추지 않은 채 공산을 쳐다봤다.
"무릇 올바른 길에는 장애가 될 게 없다지 않느냐. 오랜 역사와 주권의 전통을 가진 우리가 스스로 독립된 나라를 쟁취하는 일이야 말로 진리 중의 절대 진리일 것이다." 공산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이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지금 추진하고 있는 거사에 대한 성공과, 독립된 나라의 밝은 미래를 확신하는 듯했다.
"아버님, 이 일을 우리만 알고 있을 게 아니라, 만민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송수근 역시 한껏 고무된 표정이었다.
"물론이다. 이 일은 밖으로 우리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리는 일이지만, 또한 안으로 우리 백성 모두 실제적으로 그런 의지와 역량이 충만함을 또한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때마침 서울에서 시작한 3.1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져 이곳 성주에서도 호응해 들고 일어난다하니, 이를 기회로 이 사실을 널리 알림이 좋을 듯하구나."
공산은 이미 생각해둔 게 있었던 듯 거침없이 말을 이어갔다. "글을 배워 이런 때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인근은 그의 말에서 공산이 이미 격문의 초안을 정해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 밤, 사랑은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인근은 먹을 진하게 갈아놓고 공산을 쳐다보았다. 마음을 가다듬는지, 공산은 촉수 낮은 호롱불 아래서 지그시 눈을 내려 감고 있었다.
"이 백세각의 유래를 아느냐?"
이윽고 눈을 뜬 공산이 인근에게 뜻밖의 질문을 했다. 야계의 자손이라면 누구라도 모를 리가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공산은 마치 이제 막 소학을 배우기 시작한 학동을 가르치듯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백세각을 지은 야계 어른은 본래 효심이 깊고 충직한 분이셨다. 갈암 선생이 그분의 묘비명을 지으면서 마지막 부분에 '훌륭한 송공(宋公)은 / 타고난 성품이 강렬하여 / 정색하고 조정에 서니 / 아무도 그 뜻을 꺾지 못했도다 / 좌우에서 두드리고 흔들수록 / 절의와 지조는 더욱 굳었도다 / 비록 사람과는 어긋났어도 / 하늘에는 한 점 부끄러움 없었도다'고 그의 인품을 표현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 어른은 효제와 인의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실천하는 분이셨다. 부모가 살아있을 때는 정성을 다해 봉양했고, 부친이 위독할 때는 목욕시키면서 대변 맛을 보면서까지 건강 상태를 보살폈다. 그리고 부친이 사망하자 3년 동안 여막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러한 분이니, 충의 또한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을사사화 당시의 일이다. 대권을 잡은 소윤의 윤원형이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정적인 윤임의 대윤 일파를 숙청하려 했다. 문제는 소윤이 조정대신들의 공식적인 논의를 거치지 않고, 다만 문정왕후의 밀지에 의해 숙청을 단행했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간을 중심으로 한 관리들이 밀지의 불가함을 들어 연일 상소를 올렸는데, 야계 어른은 당시 사헌부 집의로서 이 일의 부당함을 가장 강경하게 주장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중학에서 회의를 하던 날 공(야계)은 스스로 그 사태를 짐작하고 동료에게 말하기를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드러내 죽일 일이지, 태평성대에 밀지를 내리는 것이 어찌 밝은 세상의 일인가' 했다. 대사헌 민제인이 밀지를 극렬히 추진하려고 하자 공은 '윤원형이 임금의 외숙으로서 임금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도리어 비밀리에 국모에게 의뢰해 사람들을 해치려 하니 이것이 될 말인가. 오늘 반드시 먼저 이 사람을 제거해야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것이다'하고 김저, 박광우 등과 더불어 팔을 걷어붙이고 큰 소리를 지르는데 의기가 늠름하여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라고 기록될 정도였다.
윤원형의 무리는 외모가 왜소한 야계를 얕보고 때로는 협박을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회유를 하기도 했지만, 야계는 "내 머리는 부술 수 있고, 내 뼈는 갈 수 있어도 내 뜻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내 살점을 점점이 베어 가질지언정 어찌 간사한 모의를 받아들이리오. 따르지 않겠다."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이 사화로 많은 사람이 화를 입었고, 야계 어른도 파직을 당했지만 끝까지 당당하셨다.
지금 공산은 자신에게 야계의 그 기개와 충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니면 자신은 이미 그러하니 너희들도 그러해야한다고 가르치려는 것 같았다. 인근이 가만히 머리를 조아리자, 공산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보고 인근은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이 밤이 다 지나야 문장이 완성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야계는 을사사화 이후 1546년 대구부사에 임명되었다가, 사화 여파인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전라도 고산으로 귀양을 갔다. 귀양처에서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양정'이라 하고 날마다 주변의 유생과 더불어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경학에 심취하며 자적했다.
5년간의 유배생활 후 1551년에 사면되어 고향인 성주 고산정 마을에 돌아와 '야계산옹'이라 스스로 호를 지어 유유자적하며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때 지은 집이 바로 백세각이었다.
야계는 1558년에 별세했는데, 1870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1871년(고종7년) '충숙(임금을 섬기는데 절개를 다하는 것이 忠이고, 자기 몸을 바르게 하고 아랫사람을 잘 거느리는 것을 肅이라 함)'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새벽 별이 지고서야 '국내에 통고하는 글(通告國內文)'이 완성되었다.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처럼 짧지만 통렬한 기개가 담긴 글이었다.
"아!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오히려 사는 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다. 이 날은 무슨 날인가? 서울 이하 밖으로 이름 있는 도시, 큰 항구 및 궁산 벽촌에 이르기까지 혈기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환호하고 고무하여 일제히 한마음으로 함께 창의하였으니, 하늘의 뜻이 화를 뉘우치고 사람의 마음이 단결되었음을 이미 알 수 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