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책 자랑은 어려운 한문 책,
그렇지만 그것은 중국의 글이고,
아버지 책 자랑은 두꺼운 일본 책,
그렇지만 그것은 일본의 글이고,
언니의 책 자랑은 꼬부랑 영어 책,
그렇지만 그것은 서양의 글이고,
우리 우리 책 자랑은 우리 나라 한글 책,
온 세계에 빛내일 조선의 글이고.
- 권태응 동시집 『감자꽃』(창비아동문고14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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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응 선생의 글 중에서 역사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리듬이 살아 있고, 아이들이 또랑또랑하게 글을 읽어 내리는 음성이 들리는 듯한 이 작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가 모두 자주성이 상실된 시대라는 것을 더 이상 잘 드러낼 수 없을 정도로 극명하게 보여준다. 책이 그 시대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면, 아이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책은 우리의 삶의 거울이고 지도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대가 바뀌고 일제가 물 건너 간 지금 읽는 '언니의 책' 또한 '영어 책'
이라는 점이다. 세계화라는 말이 '덫'이 될지 '무기'가 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서너 살
때부터 영어 과외를 시키기에 혈안이 된 오늘의 현실은 서글프다기보다 무섭다는 생각이 든다. 모두들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뒤질세라 따라가는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그 아이들이 과연 다음 세대의 주인이 될 수 있을까?
권태응 시인의 오래 된 이 동시는, 수십 년 전의 시대와 오늘이 한 시대의 연속선 위에
놓여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 우리 책 자랑은 우리 나라 한글책"이고 "온 세계에 빛내
일 조선의 글"임을,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을 깨우치는 것이다.
(배창환·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