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사설 독자마당

민족 대명절 설을 맞으며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9.02.13 09:17 수정 2019.02.13 09:17

↑↑ 최 필 동
수 필 가
ⓒ 성주신문


황금돼지해 기해년 설을 맞는다. 설의 어원은 제대로 못 먹어서 '섧다'가 '설'로 변했다는 말도 있고, '낯설다'는 말에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는 등의 說이 있다. 설을 맞고 보니 내 유소년 시절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배고팠던 그 시절 평소에는 구경도 못했던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즐거움이 제일 컸었는데 그 1순위가 떡국이요 다음이 우리 전래의 과자인 강정부스러기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강정은 좀 나은 집은 찹쌀로 만들지만 대다수는 멥쌀로 만듦이 일반적이었으며, 좀 더 격상된 이름을 붙여 유밀과(油蜜果)라 불렀다. 글자에 꿀이 들어갔으니 그런 이름이 붙었던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지금은 아마도 그런 민족의 숨결이 서린 전통의 이름은 잘 쓰지도 않으니 언젠가는 국어사전에서나 그 명맥을 이어가지 않을까 한다. 하긴 지금 어르신들은 유밀과보다는 '유밀개'로, 더 막쓰는 말로는 '어리'가 더 친숙한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다음이 설빔이다. 설빔이라고 해봐야 평상시에 솜 놓은 무명 바지저고리만 입다가 남방이나 점퍼라는 말도 없을 때, 6·25전후 중고교생이 입었던 교복(일본말 후크) 같은 것을 입을 수 있으면 그게 최상이었고, 거기다 새 운동화에다 새 양말이라도 신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사실 설빔이라는 말이 그 당시에는 있는 줄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그냥 '설치레'라고 했다. 지금 들으니 표준말 설치레보다는 방언으로 썼던 '설치리'가 더 정겹고, 모두가 풍성하여 날이면 날마다가 설인 오늘에서 보는 설보다는 당시 어려웠던 설이 정서적 의미가 더 있다.
피폐했던 일제시대를 지나 광복과 전란을 거치며 부족한 것이 어디 먹거리뿐이었을까만 입을 거리도 부족하여 오늘에 비하면 '굶주리고 헐벗었다'고 함이 더 정확하리라. 그럴 때 그나마도 먹지 못했던 것 먹어보고 재수 좋으면 입을 것도 생기기까지 했으니 설과 추석은 1년 중에는 제일 큰 명절이었다. 고난의 세월 보릿고개도 있었고 온 여름내 꽁보리밥만 먹다가 추석엔 송편도 먹었으니, 오죽하면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명시구가 나왔을까. 어느 감성의 시인 그 명구가 지금도 곧잘 회자된다.

설날 새아침의 세배도 중요한 우리 세시풍속 중의 하나이다.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큰형님만 두루막 정장하고 동생들은 입던 옷이라 정갈하진 않지만 매무새 고쳐 입고 형제자매 다 모여 세배 드린 후 첫 떡국을 올린다. 엄부자모이듯 전통 유교사회에서 아버지는 늘 자애보다는 근엄함이 일상이었으니 세배를 드리는 그 아침에도 근엄과 엄존으로 따스하게 자식들 모두 얼굴 한번 둘러보고, 중후하게 '과세나 잘 하거라'가 훈시조가 아닌 제일 큰 덕담이었다. 그게 자식 사랑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유교사회의 근본이 근엄 자중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던 아버지의 존영(尊影)이 지금도 선연히 떠오른다.

이어 당내친(堂內親·10촌 이내의 혈족)들의 순회 세배가 시작되고 끝나면 차례를 지내는데, 그 순서도 엄격한 위계질서에 따라 제일 맏집부터 시작했다. 음복도 잊을 수 없는 일 중의 하나이다. 조상에게 올리는 차례도 정성을 다하지만 내놓는 명절 음식상도 마찬가지였다. 그 집 특유의 메뉴는 두고두고 얘깃거리가 되었다.
사실 오늘의 풍성한 음식에서야 정성보다는 선호·선택하는 식재료에 따라 맛도 취향도 다르지만, 그땐 평소에 배불리 먹을 수도 없다가 그런 대로 넉넉히 먹는 명절 음식이야말로 진수성찬이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차례가 다 끝나면 동네 어른들 세배에 나선다. 대개 환갑 전후의 어른들이 그 대상이었으며, 평소 좀 소원했거나 반대로 별다르게 지냈던 사이도 꼭 찾아 인사를 차렸다. 더욱이 백여 호 일촌이 다 족친이었으니 모두가 집안 어른일 수밖에 없었다.

세배를 하면 어김없이 유밀과가 나오고 덕담도 빼놓지 않는다. 좋은 꿈 꿨느냐가 주종이며 아들 귀한 집엔 '올해는 생남해야지'라고 하고, 농사 얘기 하는 것이 정해놓은 순서였다. 이러는 사이 친지애도 생기고 그 친지애는 곧 마을 공동체로 옮겨져 사회 발전의 구심점으로 발전하는 최소한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순후한 우리들 인정의 원천이었으며, 그래서 향약도 생기고 농번기에는 협동의 모태인 두레로 연결됐던 것이다. 지금도 이런 세배행사를 합동으로 하는 도배례(都拜禮·한꺼번에 절함)를 300여 년이나 이어오는, 전통을 계승하는 문중이 있다고 한다.

그랬던 시대가 농업사회의 전형이었는데 오늘의 다원화된 산업사회에서 차츰 사라져가는 고유한 전래의 미풍양속이 우선은 아쉽기만 하다. 역사 발전은 변화를 전제로 한다지만 너무 많이 변화해버린 세태에서 그 느낌의 일단을 적어보는 것이다.

반세기가 훨씬 넘는 그 많은 변화의 길목들을 어찌 다 적을 수야 있을까만 아주 극미한 세시풍속의 일면을 설을 맞으며 회상해 보았다.


저작권자 성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