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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집 - 겨울판화.1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02.03.03 19:38 수정 2002.03.03 19:38

기형도(시인)

내 유년시절 바람이 문풍지를 더듬던 동지의 밤이면 어머니는 내 머리를 당신 무릎에 뉘고 무딘 칼끝으로 시퍼런 무를 깎아주시곤 하였다.
어머니 무서워 요 저 울음소리, 어머니조차 무서워요. 얘야, 그것은 네 속에서 울리는 소리란다. 네가 크면 너는 이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
자정 지나 앞마당에 은빛 금속처럼 서리가 내릴 때까지 어머니는 마른 손으로 종잇장 같은 내 배를 자꾸만 쓸어내렸다.
처마 밑 시래기 한줌 부스러짐으로 천천히 등을 돌리던 바람의 한숨. 사위어가는 호롱불 주위로 방안 가득 풀풀 수 십 장 입김이 날리던 밤, 그 작은 소년과 어머니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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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어린 시절은 부족함으로 가득 채워졌던 시절이다. 먹을 것이 없어 꽁보리밥과 감
자 따위를 먹으며 자랐고, 도시락 반찬은 주로 콩장이었다. 겨울밤에는 먹을 것이 없어 무 구덩이에서 무를 꺼내와 깎아 먹었고, 밭 한 뙈기 없었던 우리에게 고구마는 귀한 간식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설 시대로 넘어간 옛날 이야기다. 아이들은 이런 걸 먹지 않는다. 농경시대가 서비스 시대로 바뀌면서 먹거리가 풍족해졌고 입맛은 상품에 길들여졌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아이들과 그들의 미래가 불안하다. 홀로 서는 데 익숙하지 못한 우리 아이들 세대역시 슬픔을 겪으면서 스스로의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을 것이지만.....
이 시는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의 어린 시절의 노래다. 보편적인 가난, 호롱불 속에서
'주경야독'과 '형설의 공'을 쌓아 거기서 탈출해 보려고 발버둥치던 세대들의 아픔을 그리
움으로 승화시켜 놓은 시(詩)다.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누워 문풍지를 뒤흔드는 바람소리를 듣던 소년은, 자라서 그 가난한 '겨울을 그리워하기 위해 더 큰 소리로 울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이 되었다. 그러나 시인이 된 소년은, 미처 큰 울음 울기도 전에 벌써 '바람의 집'인 이 슬픈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도 그의 시는 우리의 가슴을 울리며 이렇게 펄펄 살아 있다니......!

(배창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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