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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성주여중고의 영원한 어머니!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9.10.22 09:31 수정 2019.10.22 09:31

↑↑ 배 태 영
성주여중고 초창기 교감
ⓒ 성주신문

성주여중고를 젖먹여 기르신 영원한 어머니, 구슬같이 맑고 티없는 성품의 최성옥(崔性玉)선생님! 1954년 봄 일제 강점기 신사 터, 커다란 바윗돌이 여기저기 그대로 박혀 있는 운동장 북편 목조 3간 교사의 복도에 마련된 흙바닥 교무실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습니다. 그날 선생님이 손수 빚은 오색 송편으로 베풀어준 그 따뜻한 환영 파티의 온정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학생 수 겨우 백여 명, 교문도 없이 학교에 들어가는 꿀밤나무에다가 星州女子中學이란 간판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글씨는 명필이었으나 中學 밑에 校 자가 붙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아직 문교부의 인가를 받지 못해서 中學校라고 부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티없는 학생들에게 '학원띠기'라는 별명이 붙여져 열등의식을 강요당했습니다. 그 당시 여학생은 대부분이 성주중학교나 성광중학교에 다녔고, 우리 학교를 찾아온 학생들은 거의가 집이 가난하거나(공납금이 반도 안 되었으므로) 남녀공학을 기피하는 일부 완고한 가정의 딸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선생님들에 대한 대우도 불문가지. 그래도 그것은 조금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다만 정규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보다 더 실력 있는 학생들로 만들어야겠다는 야심으로 불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를 악물고 눈에 불을 켜고 설쳤습니다.

선생님은 가사와 국어 두 과목을 맡으셨는데 그 어느 과목에도 다른 학교 교사들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때 경기고등여학교의 재원이요, 이화여자전문학교의 유망주였던 선생님께서 고향인 성주로 피란을 와서 자녀 넷을 혼자 힘으로 키우면서 초창기의 학교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안타까이 여겨, 대우가 월등한 공립학교로 오라는 종용이 수차 있었지만 선생님은 처음 뜻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중학교 인가를 받으면 학생들이 몰려들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시설 좋고 역사가 있는 공학 학교로 다 빠지고 정원의 반을 겨우 채웠습니다. 학생 하나라도 더 보태기 위해서 수업이 끝나면 20리가 넘는 고갯길을 걸어가 달빛을 밟고 돌아온 일이 그 몇 번이었는지 모릅니다. 교육이 아니라 일종의 투쟁이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서로를 헤아릴 수 있었고, 울지 않아도 서로의 눈물을 볼 수 있었으며, 하나를 완성하기 위한 둘이 되어 후벼파고 쥐어뜯으면서 터널을 파듯 광명의 피안을 향해 손바닥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함께 노를 저었습니다.

남녀공학 학교로부터 여학생을 양보받기 위한 교섭을 수차례 해보았으나 실패하고 내려진 결론은 여학교로서의 특수성을 부각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 첫 작업이 제1회 교내 수예품 전시회였습니다. 하나에서 열까지 선생님의 아이디어에 의해 군민들을 깜짝 놀라게 할 작품들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학교 교무실에서 염색 작업을 하다가 끓는 물이 엎질러져서 선생님의 왼쪽 손을 온통 고무풍선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는 수예품 전시회고 뭐고 끝장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튿날 누구보다도 먼저 나와 끝내는 그 전시회를 격찬과 감탄리에 막을 내리게 했습니다. 여식을 가진 부형들의 인식을 180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이듬해부터는 입학지원자가 정원을 초과해서 비로소 입학시험을 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학급 수가 늘고 드디어 공학 학교들이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왜 내가 선생님을 생각하며 성주여중고의 초창기의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성주여중고를 떼어놓고는 선생님의 인생이 그 의미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마치 성주여중고를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나도 선생님과 같이 끝까지 같은 배를 타려고 했지만 "이제 배 선생이 없어도 이 배는 제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라"고 격려와 용기를 주신 분도 선생님이셨습니다. 저는 선생님 곁을 떠났지만 선생님은 끝까지 남으셔서 교사로 교감으로, 제2대 학교장으로서 심혈을 다하여 오늘날과 같은 훌륭한 학교로서의 터전을 마련하고 명예롭게 정년퇴임을 하셨습니다.

중동중고등학교를 설립하시고 서울대 초대 총장을 지내신 백농 최규동 선생의 장녀로서, 엄격한 교육자 가정에서 자라난 선생님은 역시 콩 날 데 콩 나고 팥 날 데 팥 나는 경위 바르고 청렴하며, 정직한 성품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이러한 성품이 요령이나 적당주의와 어느 정도의 타협을 이루어나가야만 하는 세상에서 선생님을 고민하게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는 어떠한 희생이라도 대아(大我)를 위해서 감수할 아량이 있고,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참고 견딜 인내가 있으며, 원수의 마음이라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사랑과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졸업생들의 사랑받는 어머니요, 신뢰받는 상담자요, 존경받는 영원한 스승이신 것입니다.

그러신 선생님께서 지난 10월 11일 향년 102세의 장수를 누리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수고와 근심 걱정 없는 하늘 나라에서, 흙바닥 교무실에서 만났을 때, 대학을 갓 나온 숙녀 초년생처럼 그렇게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거듭나셔서, 앞서 가신 채명득 교장선생과 김선효·류삼식·조동호 이사들을 만나 옛 이야기 한껏 꽃피우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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