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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에게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02.03.29 09:31 수정 2002.03.29 09:31

서정홍(시인)

아무도 너에게
가문 날 물을 주거나 거름 주지 않아도
비바람 부는 날 막대기 하나 세워주지 않아도
눈 내리는 날 볏짚조차 덮어주지 않아도
아무도 너에게
따뜻한 손길 내밀지 않아도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아도

너는 봄이면 싹을 틔우고
여름이면 잎이 자랐다
가을이면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날 줄 알았다
추운 겨울 내내, 스스로 네 몸을 썩혀서
또 다른 봄이 오면 싹을 틔울 줄 알았다.

아무도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너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사랑이, 그 큰 사랑이
험한 세상을 버티는 힘이 되었다
가장 큰 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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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는 풀이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뽑아도 뽑아도 다시 일어나는 저 힘이,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생각다가, 문득 내게로 들어오면 나를 지탱하는 생명의 힘이요, 나무에게는 나무를 키우는 생성의 힘이며 우주 만물에 들어있기도 하고 우주를 만들어낸 빅뱅의 힘이 된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러자 편안해졌다. 물고기가 물 속에서 편안해지듯이, 사람도 스스로 작은 우주이면서 큰 우주의 일부라는 것을 알면 편안해진다.
그 힘은 우리에게 '험한 세상을 버티는 힘'이며,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는 사랑의 힘이다. 이 시를 듣고 나서 더는 풀이 무섭지 않게 된다면, 그것이 곧 이 시의 '힘'이다.

( 배창환 ·시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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