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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聰)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02.04.04 00:49 수정 2002.04.04 00:49

초전중 박화식 교장

'총(聰)'은 '총명(聰明)하다, 귀가 밝다'는 뜻이다. 귀가 밝아야 남의 말에 귀를 잘 기울이고 들을 줄 알아야 총명해진다는 뜻일 게다.

우리는 흔히 일상 생활에서 자기 말만을 하거나, 자기 주장, 감정만을 내세워 이해를 구하면서도 남의 말을 귀담아 듣거나 상대편의 입장에서 말의 의도나 감정을 이해 또는 공유하면서 듣는 데는 매우 인색하다. 이렇게 남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서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겸손은 열린 마음, 비어 있는 마음이다.

겸손은 남들의 존재를 인정하는데서 출발한다. 즉 남들도 모든 면에서 나만큼 아니, 나보다 아는 것도 많고 사려가 깊은 점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다.

공자와 같은 위대한 학자도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언(必有我師言)이라' 고 했다. 성인도 초부(樵夫)에게 배울 점이 있다고 했으며, 우리 속담에는 할애비가 손자한테도 배운다고 했다. 불문(佛門)에서는 세 사람이 모이면 문수보살의 지혜가 나온다고 했다. 이는 곧 남의 발을 귀담아 듣고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우는 말이다.

이렇게 겸손해지기 위해서는 꼭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 제쳐야 한다. 문이 닫혀 있으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리고 마음을 항상 비워놓아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짧은 지식이나 고집(스스로는 신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편견) 아집(我執)으로 꽉 차 있어 교만해지면 내가 최고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이나 감정은 거절당한다

내가 울릉도에 근무한 적이 있었다. 도동으로 볼일 보러 갈려면 연락선을 타야 했었는데 선상(船上) 난간 밑에 일정 간격으로 구멍을 내어놓았다. 나는 그것을 보고 의아해서 구명이 나 있으면 파도에 배가 출렁이다가 바닷물이 들어오면 어떡하나 하고 의아했었다. 알고 보니 만약 큰 파도로 바닷물이 배 위에 차면 물이 나갈 곳이 없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열려 있어야 안전하다는 것이다. 들어오는 물은 있어도 나갈 곳이 없는 사해는 바로 죽음의 바다가 아니겠는가?

대나무는 속이 비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도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는 않는다. 그런 유연성 때문에 활은 대나무로 만든다. 비어 있는 것은 힘이 있다. 그러면서도 좌고우면(左顧右眄) 눈치를 살피지 않고 곧다. 비어있으면서 곧은 것 - 이것이야말로 군자의 기상이다. 대나무가 4군자의 하나인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시인 묵객(墨客)들은 이런 기상을 사랑하고 기리고 있다.
臨溪矛屋獨閑居하니 (시냇가 초옥에 홀로 한가히 사노니)
月白風淸興有餘라 (달은 밝고 바람이 맑아 흥이 절로 나는구나)
外客不來山鳥語하매 (외객은 오지 않고 산새만 지저귀는데)
移床竹塢臥看書라 (자리를 대숲 언덕에 옮겨 책을 보노라)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낮을수록 물은 많이 고인다. 겸손은 낮지만 풍요롭다. 겸손은 나약하고 손해보고 위험한 것이 아니다.
열려 있는 것은 안전하고, 비어 있는 것은 힘이 있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대화를 하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곰곰이 살펴보면 화자(話者)는 있지만 의외로 대화가 없는 경우가 많다. 즉 남의 말은 들으려고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 의견이나 자기 감정만을 받아주기를 바라고 열심히 지껄이는 경우를 본다. 상대방이 말을 끄집어 낼 양이면 말이 더 빨라지고, 톤은 더 높아진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다. 대화는 상대편을 인정하고 서로의 의견이나 감정에 접근하여 타협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지 일방 통행적 강요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겸손은 참으로 어렵다. 공자님도 60에 이순(耳順)하셨으니 말이다. '총(聰)'은 겸손에서 시작되고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고 이것은 바로 민주주의 기초가 되고, 요즈음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EQ(감정지수)의 요체(要諦)이다.

'총(聰)'은 어렵지만 포기할 수 없고 뼈아픈 자성(自省)으로 부단히 노력해야 할 인생의 길고 긴 숙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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