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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읍 경산1리 별고을 밝히는 ‘별중의 별’

정미정 기자 입력 2009.08.21 08:48 수정 2009.08.25 02:09

성주읍 경산1리 별고을 밝히는 ‘별중의 별’

↑↑ 봉두산 아래서 본 경산1리 마을 전경.
ⓒ 성주신문

우리의 ‘마을’은 우리 삶의 진원지다. 星州人들은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며 인생의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면서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유구한 세월의 흐름만큼 마을에서는 전통의 향기가 베어나고 주민들에게서는 훈훈한 인정이 쌓여갔다. 성산가야의 옛 도읍지로 찬란했던 가야문화의 맥이 면면히 흐르는 유서 깊은 고장 星州. 예향이자 백두대간의 끝자락이 감도는 반도의 길지 성주의 오롯한 역사는 이 ‘마을’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이에 오늘의 성주를 있게 한 근본 터전인 마을을 둘러봄으로써 오랜 역사 속에 품어온 성주를 제대로 그려내, 문화 성주로의 면모를 새롭게 함은 물론 지역의 소중한 문화와 역사를 대내외에 올바로 알릴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편집자주】

명실공히 성주를 대표하는 郡 행정의 중심지 성주읍. 이 성주읍의 중심지는 바로 경산1리로, 가히 별고을 星州를 밝히는 ‘별중의 별’이라 불릴 만하다.

성주의 진산(鎭山)인 인현산(185m)에서 구불구불 용트림해 내린 읍기(邑基)의 주맥이 마을 뒤에서 표고 약 80m의 봉두산의 구릉으로 맺혔고, 이천이 동류하면서 곡류해 경관이 수려한 지역이다.

이 지역은 고려 건국초기부터 경산부의 읍기로 발전해서 이곳에 예산리·삼산리 등 읍내 10개리가 당시부터 각방에 준한 내방인 4개리로 편제돼 용산리(방)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획개편 때 경산동이 돼 현재 8개 행정리로 구분된다.

사골(史洞)마을을 아시나요

경산1리의 자연부락은 바로 사골(史洞)마을.
천주교회(성당) 뒷산 쪽에 있는 봉두산은 예전부터 읍의 지맥이 결집된 명혈로 여겨 신성시됐고, 1900년초까지 천년백림이 숲을 이뤘고 인축의 접근을 엄하게 막았다.

이 부근에 형성된 자연부락이 바로 삿꼴(사골)로, 명칭의 유래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중국의 고대문화로부터 동양에서 행해진 전통으로 왕이 나라를 얻으면 중앙과 각 읍에 국토(사)와 오곡(직)의 신단을 만들어 사직신에게 제사를 춘추로 올렸고, 그 업무를 맡은 사직서를 이 곳에 두었으므로 사동(사골)이라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1408년(조선 태조 16년) 4대사고의 하나인 성주사고(星州史庫)가 설치됐던 곳이라 해(임진왜란 후 태백산사고로 옮김) 이 곳을 사동이라 했다는 것이다.
사골의 유래를 설명하는 설이 하나가 아니나, 워낙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감안할 때 정확한 유래를 확인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만 주민들은 사골의 유래가 무엇이든 내 고향, 내 마을을 사랑한다고 자랑하고 있을 뿐이다.

고향, 단지 그곳에 있을 뿐…

↑↑ 할머니들이 임시회관에 모여 마을의 자랑거리를 설명하고 있다.
ⓒ 성주신문
“우리 동네 안에는 학교, 병원, 약국, 상점 없는 게 없다네”
경산1리는 성주의 생활중심지다. 7월말 현재 주민은 377세대, 963명(남 474, 여 489명)으로, 이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은 126명이고 이 중 70% 이상이 할머니다.

주민 대부분이 농업보다는 상업을 주업으로 삼아 거주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타 동네에 비해 인구수가 많은 대신 젊은층 이동이 잦은 것이 특징이다.

고향을 떠나는 이들이 있으니 지키는 이들도 있다. 지키는 이들이 있기에 떠난 이들도 태생의 근원을 찾아 돌아올 곳이 있는 것이다.

대다수의 농촌마을이 그러하듯 이 곳 역시 자식들을 객지로 떠나보내고 홀로 고향을 지키고 계신 어르신들이 많다. 아울러 비록 이 마을에서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제2의 고향으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김학조(74) 노인회장은 김천이 고향이지만 직장(당시 전매청)에서 맺은 성주와의 인연을 잊지 못해 1975년 정착, 현재까지 30여년을 성주인으로 살아오고 있다.

이장수(85) 할머니 역시 6·25 사변 이후, 그러니까 현재 62살 된 딸이 3살 적에 동네에 왔으니 59년째 마을을 지켜오고 있는 셈이라고 한다. “자식들은 모두 대도시로 나갔지만 나만은 고향을 떠날 수가 있나”고 하신다.

이 할머니는 마을의 자랑거리인 봉두산을 이야기하며 “예전에는 정상에 사람이 살기도 했었는데… 아무개가 나간 후에는…”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기억에 남는 것은 “지난해인가 한 업자가 봉두산 정상 표지석을 마음대로 파내 훼손시켰다”며 안타까워하며 “넘어져 있는 표지석을 복구해 우리의 자랑거리 봉두산을 후손들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애향심을 나타낸 것이다.

한편 이 마을 최고령 어르신은 손점순·배상임(86) 할머니다.

우리 동네 볼거리는요

↑↑ 도지정 문화재 연계당.
ⓒ 성주신문
주민들은 마을의 자랑거리로 봉두산에 있는 ‘임정사’(문화체육관광부 전통사찰 지정)와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115호 ‘연계당’ 등을 꼽았다.
‘봉두산 임정사’(林淨寺)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사찰이다.


천주교 성당 주변에 주택가가 밀집한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찾을 수 있는 임정사의 풍광은 여느 산중사찰과도 다른 푸근함이 있다. 입구부터 여염집의 대문과 차이가 없어 입구의 ‘임정사’라는 편액이 없다면 자칫 여느 문중 집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고.

최초 들어선 때는 조선시대로, 고종 27년인 1890년에 우산당 상진(牛山堂 相珍) 스님이 창건했다고 한다. 임정사라는 이름은 1936년 무렵에야 공식적으로 사용했을 정도로 절의 역사는 깊지 않지만, 도심 속의 작은 휴식처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 문광부 전통사찰로 지정된 임정사.
ⓒ 성주신문 
현재 임정사의 주요 건물로는 극락전이 주불전을 이루고 있으며, 삼성각과 종각이 있다.
‘연계당’은 조선시대 소과에 급제한 생원 및 진사들이 모여 선현을 숭모하고 서로 면학을 격려하는 장소인 사마소(司馬所)에서 비롯된 것이다.

1588년(선조 21)에 성주성(星州城) 서문 밖에 처음 건립됐으나, 그 후 건물이 많이 낡아 후손들이 계를 조직해 1860년(철종 11)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우고 이름을 연계당이라 했다.

연계당에 보관돼 있는 ‘연계소영일기’는 1860년 이전 공사를 날짜별로 기록하고, 특히 건축 자재의 매입 및 가격, 목수, 토공(土工) 등의 수와 급료 등을 기록하고 있어 당시 건축공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우리 고민 들어보시래요

↑↑ 골목마다 들어선 차량으로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 성주신문
경산1리 마을 주민들은 수도마을에 걸맞지 않은 낙후된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서 건강한 삶을 보내고 계신 어르신들을 만나 고민을 들어보니 휴식공간 부족, 주차장 부족으로 위협받는 보행권 등을 아쉬움으로 꼽았다.

서상필(67) 이장은 “마을에 초등학교가 있다보니 어린이보호구역에 속해 길가 주차가 금지돼 있다”며 “초등학교 옆에 길을 넓히더니 집앞이 주차장화해 노인들이 위험할 때가 많다”며 마을회관 옆 공터를 매입해 공용주차장을 마련해 줄 것을 현안으로 요청했다.

박무웅(65)씨 역시 “경산1리는 인구·면적 등으로 봤을 때 비중이 상당하다”며 “군민회관도 들어서 있지만 주차장이 없어 골목마다 차들로 메워져 있어 위험하다. 게다가 임정사 밑 소방도로가 확보되지 않아 화재의 위험에 노출돼 있는 등 수도마을로서는 걸맞지 않은 낙후된 모습이 아쉽다”고 전했다.

더불어 “최근 노인복지가 강조되며 다른 동네에는 정자(팔각정) 등의 쉼터가 흔히 들어서 있지만 정작 우리 마을은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노인들이 쉴 수 있는 쉼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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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상필 이장(左)과 김학조 노인회장.
ⓒ 성주신문 
※서상필(67) 이장, 김학조(74) 노인회장, 김을연(85), 박태순(79), 백덕순(82), 이장수(85), 허 기(78) 할머니, 박무웅(66)씨 그리고 이름을 밝히기 꺼려하시는 할머니들까지 마을 이야기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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