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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남면 도성리>역사, 교통, 환경이 어우러진 그 곳이 좋다

정미정 기자 입력 2009.09.02 08:32 수정 2009.09.02 08:41

역사, 교통, 환경이 어우러진 그 곳이 좋다

↑↑ 선남면 도성리 마을 전경.
ⓒ 성주신문

■휴식처가 되는 마을, 도성리

여름 끝자락에 찾은 선남면 도성리에는 휴식의 그림자가 짙게 베어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난 잠시만의 휴식, 자연에서 느끼는 여유로움이 곧 휴식이 아닌가.

성주읍에서 대구 방면으로 국도 30호선을 따라 5분여 달리다 보면 좌측으로 도성리 마을회관이 소재한 못둑 마을의 풍경이 평화롭게 다가온다. 삭막하기만 한 국도변 풍경과는 달리 마을 초입에는 샛노란 성주참외가 탐스럽게 그려진 담이 마을안까지 주욱 이어져 있고, 알록달록 탐스럽게 핀 꽃들이 입구를 지키며 마을을 찾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도성리는 들이 넓게 펼쳐진 평지에 자리한 농촌마을로 서쪽에는 낙동강이 흐른다. 마을이 길가에 이룩돼 도성리(道成里)라고 불리는 것이며, 대구의 근교농촌으로 편리한 교통과 쾌적한 환경이 어우러진 활기 가득한 곳이다.

■도성리 마을 형성을 돌아보다

배나무가 많다 하여 ‘배나무정 마을’

도성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의 하나가 바로 ‘배나무정 마을’이다.
하지만 현 젊은 세대에서는 배나무정 마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면(面) 행정공무원조차 배나무정 마을은 생소한 표현이다. 성주의 역사서인 성주군지(星州郡誌, 1996)에서도 자연부락에 배나무정은 포함돼 있지 않다. 다만 문화유적란에 ‘인근 유현의 놀이터로 활용하고 있다’고 소개돼 있을 뿐이다.

이 마을을 젊은 세대에서는 편의적으로 광영 마을과 구분해 바깥광영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는 맞지 않는 표현이다. 이조 말에는 梨(배나무 이)자를 써서 이남리라고도 불린 이 마을은 ‘오랜 배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다’하여 불려지게 된 것이다.

3대 이상 고향마을을 지키고 있는 원로어르신들은 배나무정 마을의 유래와 관련해 “일제시대에는 농창이라는 농산물 저장창고가 있었다”며 “이를 두고 일부는 예전 차나 수송수단이 마땅치 않았기에 곡식을 배(선박)로 이동했다하여 배나무정이라고 불린다는 얘기도 전하나 이는 단지 속설일 뿐”이라고 밝혔다.

또한 “마을이 생성된 지는 오래됐으나 예전에는 서너 집에 불과해 역사를 증명하는 자료가 없다”며 “근래 선남농공단지를 비롯해 상가, 빌라들이 들어서며 160∼170가구로 크게 성장하고 있는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광령당 선비가 이룬 ‘광영(廣寧) 마을’

전국적으로 많은 자연부락이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생성됐다. 전쟁을 피하려다보니 골짜기를 찾아 뿌리를 내린 경우로, 광영 마을 역시 이에 속한다.

광영은 성주에서 대구를 나드는 도로가 용암방면의 삼거리 지역에서 북편에 접한 부위의 마을로, 약 420년 전에 이원일(李元逸) 선비가 임지왜란(1592∼1598) 때에 못안에서 피난했다 하여 그의 호인 廣寧堂(광령당)을 따서 광령지라고 하고, 그 후 마을을 조성했다 하여 광영이라 칭하였다 한다.

광산 이씨 집성촌으로, 현재 20호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도성리 중간에 있어‘중리(中里) 마을’

중리는 마안골 서편에 가까이 있는 마을이고 마을 뒤의 표고 120m로 말티고개를 등지고 서남으로 1km거리로 못둑 마을(池原)과 이웃하고 있다. 마을 남쪽은 표고 75m의 나지막한 산봉이 있다.

이 마을의 유래는 광영과 마안골 사이에 있다하여 중리(中里)라 불리게 됐으며, 도성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군지에서는 약 260년 전에 마을이 조성됐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원로 어르신들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이에 따르면 “중리 마을은 초반 동네라고 하기에는 단출한 몇몇 가구만 살다보니 기록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며 “다만 마안골보다도 40∼50년 전부터 있어왔기에 마을역사를 약 34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말안장과 같아 ‘마안골(馬鞍) 마을’

마안골은 마을 서편에 중리(中里)로 부르는 같은 마을권의 부락으로 형성돼 있고, 그 서쪽 선남면 소재지로 내왕했던 마안고개의 마을이 있다.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집성촌(集姓村)이기도 하다.

군지에 따르면 ‘170년 전에 박치운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고 뒷산의 맥이 말안장과 같다하여 마른산 마을을 마안이라 칭했다’고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원로 어르신 역시 이 유래에는 동의하고 있지만, 역사에 대해서는 이견을 내고 있다.

박종길(69) 어르신은 “마안골에 거주한 나의 11대 조부의 묘가 이 곳에 있는데, 한 세대를 30년만 잡아도 마을의 역사는 최소 300년 이상으로 볼 수 있다”며 “군지에서 보는 170년의 역사는 이해할 수 없는 결과”라고 주장했다.


↑↑ 마을회관이 자리한 못둑 마을 입구.
ⓒ 성주신문
못둑에 있다하여 ‘못둑(池原) 마을’

도성리 마을회관이 소재한 못둑(池原) 마을은 면소재지 동남 1.7km거리의 30번 국도를 접해서 남향한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는 명인중정보고등학교가 있다.

군지에 따르면 ‘100여년 전에 소유지 둑에 박일출 선비가 명산지라 하여 마을을 개척하고, 못둑에 있다하여 지원이라 이름하여 왔다’고 한다.

 
↑↑ 마을회관이 자리한 못둑 마을 입구.
ⓒ 성주신문 
원로 어르신들은 “못둑이 가장 최근에 생성된 마을로, 이 곳의 주민들은 대다수 인근 마안골이나 중리 등지에서 이사와서 모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한 후 “마을회관이 있는 이 자리를 비롯한 마을이 바로 못이었고, 도로가 둑이 있다”며 마을의 유래에 동의했다. 하지만 마을의 역사가 100여년에 불과하다는 데에는 이견을 제시하고 있다.

서찬준(71) 어르신은 “50대 초반 중리에서 못둑 마을로 이사 온 조부가 82세가 되던 해 내가 태어났고, 지금까지 살아오고 있다”며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이 살아온 세월도 70년이 넘었는데, 100여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지나치게 짧게 잡은 것이다”며 “우리는 마을의 역사를 200년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동네 자랑거리는요

인륜의 으뜸 ‘효와 의’가 흐른다

↑↑ 효자 박구의 박구효자정려비.
ⓒ 성주신문
박구효자정려비는 1999년 3월 11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6호로 지정됐다.
조선시대 때 예조판서(禮曺判書)로 증직된 박구(朴矩: ?∼1425)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535년(중종 30) 나라에서 내린 정려비로,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박구의 호는 동천(東川)이며 본관은 함양(咸陽)이다. 성주목 오도마루에서 개성부윤 원택(元擇)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태종·세종 연간에 강원도병마도절제사, 경상도수군도안무처치사, 좌군총제 등을 역임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졌는데, 어머니인 정부인 이씨가 병환이 들자 천지신명께 빌어 얼음 위로 뛰어오르는 잉어를 구했으며, 눈 속에서 복숭아를 얻어 병을 구완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기도 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묘소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며, 후일 이러한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1535년(중종 30)에 정려(旌閭)를 내리고 자헌대부 예조판서를 추증했다.

이 비는 원래 묘소 남쪽 백천가에 있었으나 홍수로 인해 광녕산으로 옮겼다가 1818년 이곳에 비각을 건립하여 도성리 못둑 마을에 안치했다.

박구효자정려비는 박안연 등의 세 효자 정문인 삼효각(三孝閣)과 함께 도성리가 인륜의 가장 으뜸 되는 덕목인 효와 의가 가득한 마을임을 대내외로 알리는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우리 고민 들어보실래요

도성리에는 8월말 현재 345세대, 765명(남 416명, 여 349명)이 생활하고 있다.
농촌마을로 참외주산지인 성주에 속하기에 주작목은 역시 참외지만, 공단이 입주해 있기에 26개 정도의 업체가 있고 발전이 기대되는 마을이다.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마을주민들의 고민은 무엇일까.
최우선 현안으로 꼽는 것은 도성리 전반의 배수로 개선 사업이다. 주민들은 “200㎜ 이상 큰비가 내리면 전반적으로 큰 피해가 우려되는 만큼 무엇보다도 배수로정비가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아울러 “마안골 마을의 도로 폭이 3m에 불과해 차량 교행에 불편을 전하며, 주진입로 만이라도 정비가 필요하다”는 건의를 전했다.

한편 이 마을 남녀 최고령 어르신은 이명달(88) 할아버지와 이수임(96) 할머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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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동호 이장과 석병준 노인회장과 원로 어르신들이 마을회관에 모여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 성주신문


※마을 이야기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신 김동호(52) 이장, 석병준(75) 노인회장, 김경진(73), 서찬준(71), 김형찬(70), 박종길(69), 김태기(69), 정전조(66), 김동곤(69) 어르신을 비롯한 모든 분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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