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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부락을 찾아서-용암면 용정1리

정미정 기자 입력 2009.09.23 14:58 수정 2009.09.23 02:58

역경 딛고 용(龍)의 기상으로 우뚝 선 ‘용정’

ⓒ 성주신문

■마을 형성을 돌아보다

용암면 소재지 마을이 바로 ‘용정리’다.
면사무소를 비롯한 농협·파출소·우체국·마을금고 등 기관단체가 늘어선 중심마을로, 소재지 부근인 1리 용정 마을과 고령 통로의 2리 회봉 마을로 구분된다.

성주군지에서는 1리의 자연부락을 용정(송정)이라고 했으며, 용정은 김치종(金治宗)이란 사람이 이 마을에 입향할 당시 형세가 용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정자 근처에 나무가 많아서 용정(龍亭)이라 불렀고, 송정은 용정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서 소나무 정자가 있었다고 송정(松亭)이라 불리어 진다.

마을 원로들이 알고 있다는 유래는 여기에서 좀더 세분화 한다.
현재 생성된 동네는 천재지변으로 생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11대째 이 마을을 지키고 있다는 김종민(78) 어르신은 “지금의 마을은 원래 하천이었고, 산 아래 하천이 바로 초기 마을이 형성된 곳”이라며 “그 곳은 소나무가 많고 정자가 있었기에 소나무 송(松) 자와 정자 정(亭) 자를 합해 송정(松亭) 마을이라고 불렀다”고 전했다.

이 조용한 마을에 큰 변화를 몰고 온 사건이 있는데, 바로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몰고 온 1920년 경신년 대수해. 송정 마을 역시 예외가 아니었기에 큰 비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고, 수해가 남긴 결과는 마을의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할 정도였단다.

주민들은 “동네에 집 한 채 없이 다 떠내려가자, 수몰된 고향을 떠나 현재의 마을에 움막을 지었던 것이 발전해서 소재지로 됐다”며 “보금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기근을 면치 못했다는 안타까운 역사가 전해지고 있다”고 얘기했다.

또한 “그때 내린 비로 사방이 모래와 자갈밭이 됐다”며 “아직도 일부는 논 안에 바위가 있는 곳이 여사이니 그 때의 참상은 쉬이 짐작할 수 있다”고 전했다.

아울러 “새로이 형성된 마을에는 현재는 물론 과거에도 소나무가 없었다. 따라서 송정 마을은 이전에 불려진 명칭”이라며 “마을 앞 산 정상에 15도 각도로 용이 등천하며 꼬리로 친 문양이 바위에 새겨져 있기에, 용 용(龍) 자와 정자 정(亭) 자를 합해 용정(龍亭) 마을로 부르게 됐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이 바위에 용이 올라가며 남긴 흡사 뱀 비늘 문양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인지 인위적으로 조각한 것인지 의견이 분분한데, 주민들은 “위쪽은 깊이 무늬 돼 있고 꼬리 근처는 옅게 보일 듯 말 듯 표현한 것을 봤을 때, 사람이 그렇게까지 세밀히 조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라고 밝혔다.

성주군지에서도 이를 표현하고 있다. 마을 앞 표고 124m의 오뚝한 창애기봉(蒼崖奇峰) 즉 높은 절벽과 기묘한 바위가 수려하게 앉아 있어 용두봉(龍頭峰)이라 불리우며, 연이어 4개의 암봉(岩奉)이 동남쪽으로 늘어 있어 용두산능이라 했다. 용두봉 단애(斷崖) 아래는 맑고 깨끗한 두의천(豆衣川)의 곡류를 곁들여 수려한 운치로 도원지경을 방불케 한다.

용정리는 동북의 선남면과 남으로 고령군을 드나들며, 북으로 성주읍과 동남으로 고령 다산(茶山)으로 이어진다. 근래 현풍∼김천간 고속도로 남성주IC가 설치되며 교통 요충지로 더욱 발전이 기대되는 곳이다.
이 마을은 통일신라 이래 두의곡방(豆衣谷坊)에 속했고, 1895년 두릉면(杜陵面)의 용정동으로 편제, 1914년 3월 대동면(大同面)과 합면(合面)돼 용암면이 돼 면소재지로 형성됐다.

■우리 동네 자랑거리는요

용정리 주민들의 자랑거리는 구한말 유명한 기생이었다는 앵무의 공덕비(功德碑)다.
용암우체국 앞에 단청 무늬의 아담한 비각이 있었으니 이것을 일러 ‘앵무 빗집’이라 했었다. 그러나 빗집은 6·25동란 때에 없어지고 지금은 초라한 빗돌만 앙상하게 알몸으로 남아 있다.

고을의 세도가나 원님을 기리는 공덕비는 흔히 볼 수 있으나 주민들이 기생을 위해 공덕비를 세워준 사례는 극히 드물기에 더욱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 앵무의 공덕비(功德碑)
ⓒ 성주신문
앵무는 1889∼1946년 사이에 생존한 기녀의 이름으로서 일개 기생의 몸으로서 용암면의 농업 경제기반을 일으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두리방천의 복구를 이룩했으니, 누가 그녀를 감히 기생이라 천시할 수 있었겠나.

경신년 대수 이전에도 매년 큰물이 져 논밭이 쓸려나가자 제방을 쌓아 땅을 일구고 지켰다. 이 두리방천의 복구로 생긴 너른 들판을 지금은 ‘새내들’이라고 부르는데, 어르신들은 ‘앵무들’이라고도 부른다.

마을원로들은 “기생이라고 모두가 같은 것은 아니다. 앵무 할머니는 도백(道伯, 관찰사)급을 상대했는데, 이는 그들이 문장을 써서 이야기 할 때 글로 답할 수 있을 정도로 문예도 뛰어나야 가능했다”며 “과거시험 통과는 문제도 안 되는 실력”이라고 자랑했다.

더불어 “힘든 시절, 앵무 할머니가 아니면 끼니도 해결할 수 없는 이들이 많았다”며 “갑신년 대수 후에는 특히 그 진가가 발휘됐고, 나중에 주민들이 그를 기려 비로 세우고 5일간 성대한 마을잔치가 펼쳐지기도 했다”고 전했다.
앵무의 공덕비에는 수해로 늪이 된 곳에 방천을 쌓아 오곡이 용처럼 솟아나게 한 공덕을 기린다는 내용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우리 고민 들어보실래요

용정1리에는 9월 7일 현재 86세대, 180명(남 89명, 여 91명)이 생활하고 있다.
마을주민의 70∼80%가 65세 이상 노인이고, 이 가운데 80%가 홀로사는 노인이다. 참외의 고장에 속하기에 주 작목은 참외라지만 평균연령이 65세가 넘기에 생산력이 저하되며, 실제로 농사를 짓는 이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노인인구가 많음에도 그늘이 돼 줄 나무가 없어 다른 마을에는 2∼3개씩 볼 수 있는 정자를 하나도 찾을 수 없고, 노인들의 쉼터 또한 부족한 실정이라고 한다.
더불어 아직도 수해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이들이 많아 선남 광영∼고령간 4차선 도로가 나면 마을의 지대가 낮아져 침수피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주민들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사업을 추진하며 피해가 없도록 추진한다고 들었지만 걱정이 앞선다”며 “선남처럼 침수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행정기관에서 확실히 조치해 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마을 이야기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신 김경호(52) 이장, 김종민(78), 김형곤(73), 곽태순(84), 김을태(84), 김점희(78), 주금식(77), 남용조(76), 서을복(75), 임학순(74), 정 용(74), 정옥란(73), 석수임(72), 서봉학(71), 김소대(68), 원영의(66), 이용판(62) 어르신을 비롯한 주민 여러분 그리고 자료 조사에 협조해 주신 용암면 백달현 면장, 복만규 부면장에 감사 드립니다.

↑↑ 김경호(52) 이장
ⓒ 성주신문
↑↑ 11대째 마을을 지키는 김종민(78) 어르신
ⓒ 성주신문
 
↑↑ 원로 어르신들이 모여 마을을 소개하고 있다.
ⓒ 성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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