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서평---
5.18 '역사의 영혼'과 만나다
한국 작단에서는 보기 드물게 무거운 주제를 정공법으로 파고드는 작가 정찬(49)씨가 장편소설 [광야](문이당)를 펴냈다. 이제는 모두 기억에서 지워버리려 애쓰는 1980년 광주항쟁을 '새삼스럽게 다루는 작품이다. 분명히 인기가 없을 주제임을 알면서도 좌고우면하지 않고 자신의 관심사를 향해 진중하게 육박해 들어가는 작가정신이 빛난다. 시류에 따라 쉽게 말하고 넘겨버릴 그날의 '광주'가 아님을 알기에, 문학과 만나는 죽음의 진실은 겉으로 드러난 피상적인 사실들과는 또다른 새로운 육신을 확보할 수 있기에 더욱 값진 것이다.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미국 '볼티모어 선' 베를린특파원 테리 머턴이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겪었던 광주를 회상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사건의 현장과 시각이 그대로 소제목이 되어 전개되는 이 소설의 화자 또한 다양하다. 예비검속을 피한 운동가 박태민, 노동자 김선욱, 도예섭 신부 등 항쟁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섰던 전두환과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 강선우의 시각에서도 그려진다. 여기에다 국외자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한국 정세의 변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짐작되는 당시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도 화자로 등장한다. 작가가 이처럼 다양한 입장의 화자를 등장시킨 것은 객관적인 진술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작가의 주된 관심은 새삼스럽게 광주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죽음에 직면한 인간들의 드라마'에 더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전두환조차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권력자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정씨는 "내가 '5월광주'를 그토록 오랫동안 들여다본 것은 죽음에 에워싸인 인간의 드라마틱한 모습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왜 그들은 죽음을 빤히 예측하면서도 그날 도청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지, 생명체라면 본능적으로 피할 죽음을 그들이 받아들여야 할 의미는 과연 무엇이었는지 작가는 진지하게 탐색해 들어간다. 작가에게 그날 도청 안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존재를 확산시키는 불가사의한 생명체'로 다가온다. 작가의 말을 더 들어보자.
"어떤 죽음도 혼자의 죽음이 아닌 것은 없다. 동시에 어떤 죽음도 혼자의 죽음인 것은 없다. 이 죽음의 이중성이 하나의 모습으로 겹칠 때, 그러니까 '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될 때 그 죽음들은 역사의 영혼이 된다."
그는 '역사의 영혼'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 반대편에는 '권력의 영혼'도 있다고 썼다. 이 지점에서 정찬 특유의 종교적인 성찰이 시작된다. 숨진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있는 마리아의 비통한 모습을 조각한 피에타상 주위에서 머턴이 도청으로 들어가려는 도예섭 신부와 나누는 대화에서 작가의 작의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도청으로 가는 것은 벌을 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도청의 젊은이들은 깨닫고 있었습니다. 거짓의 형상을 깨뜨리는 유일한 무기가 골고다언덕의 십자가임을. 도청이 그리스도의 집인 까닭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십자가란 죽음으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탈출구이자 비로소 새로운 영혼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진실임을 작가는 주장한다.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도청은 예수의 마지막 만찬장이자 권력의 영혼이 지배하는 재판정이기도 하다. 수많은 그리스도의 현신을 만날 수 있는 바로 그곳이야말로 사제에게는 이승의 마지막 종착점이었던 것이다.
---저자 소개---
정찬
1953년 부산에서 출생.
부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1983년 『언어의 세계』에 중편소설 「말의 탑」으로 등단한 그는 현실과 소설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얼음의 집」 「슬픔의 노래」 등의 무게 있는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소설 세계를 펼쳐 보이는 문제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소설집 『기억의 강』 『완전한 영혼』 『아늑한 길』, 장편소설 『세상의 저녁』 『황금사다리』 『로뎀나무 아래서』 『그림자 영혼』 『광야』가 있다.
1995년 「슬픔의 노래」로 제26회 동인문학상 수상.
--출판사 : 문이당
--출판일 : 2002년 1월 20일
--정 가 : 8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