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만 남아있는 제도이며 조상들이 살던 지방을 일컫는 것으로 '원적(原籍)'이라고도 한다.
본관은 조상의 거주지인 지명과 공간의 연속성을 나타내고, 성씨(姓氏)는 부계의 혈통과 시간의 연속성을 나타낸다.
성주군은 '관향의 고장'이라고도 불릴 만큼 많은 성씨들이 성주를 기반으로 집성촌을 형성해 공동체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성주에는 성주를 본으로 하지 않는 성씨들도 입향해 집성촌을 형성해 자신들의 뿌리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에 가천면 법전2리, 벽진면 달창리 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는 김녕김씨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제7회에서는 김녕김씨 기원 및 유래, 시조, 대표 인물 및 후손 등 각 문중 제반사항 전반에 대해 심도 있게 파악해본다. 나아가 각 문중 및 지역민들에게 충효사상 및 주인정신 등을 함양시키고자 한다. 【편집자 주】
김녕김씨는 경상남도 김해의 옛 지명인 김녕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이다.
김녕김씨의 시조인 김시흥은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35세손이자 신라 경순왕의 8세손이다.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전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4대 석탈해왕 9년 춘삼월 한밤중에 왕이 들으니 경주 금성 서리에 있는 시림사이에서 밝은 빛과 함께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 왕은 호공을 시켜 그 곳을 살피게 했다. 살펴보니 황금색의 작은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는데 왕이 궤를 열어본 즉 기이한 옥동자가 누워있었다. 왕은 하늘이 보내준 아들이라고 여겨 왕자로 책봉하고 금궤에서 나왔다고 성을 김씨라 했으며 이때부터 시림은 계림이라고 했다.
김시흥은 고려 인조때 평장사를 역임하고 묘청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김녕군에 봉해졌다.
김녕은 김해의 옛 지명으로 충선왕 2년 1310년부터 김해를 본관으로 써왔다. 한편 시조가 전혀 다른 가락국 수로왕의 후손들도 김해를 본관으로 써 이에 김해김씨를 선김으로 불렀고, 김녕김씨를 후김이라 일러 구분해 왔다.
그러나 같은 본관을 쓴 관계로 여러 가지 혼란과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해 김녕 종문에서는 왕에게 상소한 후 본관을 김녕으로 쓰게 됐다. 이에 후손들은 본관을 김녕으로 해 대를 이어오고 있다.
김녕김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성주 김녕김씨의 파조이자 단종복위운동을 주도한 충의공 김문기가 있다.
충의공파의 파조인 김문기는 호는 백촌이며 시호는 충의공이다. 김시흥의 9세손이며 이조판서 김관의 아들로 충북 옥천에서 출생했다. 김문기는 호조참판과 함길도절제사를 지냈고 둔전법을 실시해 큰 성과를 거뒀다.
이후 세조 때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로 있으면서 계유정난 때 군대를 동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실패하고 순절했다.
지난 1977년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논의 끝에 국사편찬위원회 의견을 참고해 1982년 기존 사육신에 김문기를 추가로 사육신에 현창했다.
이에 현재 서울 노량진의 사육신 공원 의절사 사당에는 김문기의 위패와 묘역이 추가돼 있다. 또한 노량진에 충의공 백촌 김문기를 기리는 백촌회관이 있다.
한편 본관이 김녕인 김녕김씨 후손들이 성주에 입향하게 된 것은 김녕군 김시흥의 9세손 충의공 백촌 김문기가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돼 그의 후손들은 옥천에서 성주로 이거해 5백년간 산거하게 됐다.
성주에는 김녕김씨의 아전문중, 어천문중, 달창문중이 가천면 법전2리, 벽진면 달창리 등 성주 곳곳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
|
|
↑↑ 매년 종인들은 예를 갖춰 묘사를 지내고 있다. |
ⓒ 성주신문 |
|
아전문중 13세손 김진복씨는 "김녕김씨 집성촌인 가천면 법전2리 아전마을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보름 전 일요일에 시제를 모시면서 종친의 화합과 예절에 대한 중요함을 되새기고 있다"고 전했다.
아전문중의 입향조인 김명중은 관조 김시흥의 15세손으로 410년 전 단종복위사건 후 역적으로 몰려 자손을 살리기 위해 성주군 가천면 법전2리 아전마을에 입향했다.
이에 김녕김씨 아전문중 후손들은 입향조를 기리기 위해 모은재 재실을 건립한 후 매년 예를 갖춰 묘사를 지내고 있다.
현재 김녕김씨 후손들은 진주, 상주, 남해, 김천, 고흥, 무안 등 전국 곳곳에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김진복씨는 "아전마을에도 60년대는 80가구 정도 살았었지만 현재는 10여가구가 남아있다. 하지만 관내 곳곳에 종친들이 많이 있다"며 "관내 종친들이 많이 있지만 서로간 잘 몰라 종친인지도 모르고 지내는 경우가 많다. 종친 화합을 위해 앞으로 노력할 것이며 상부상조하며 살아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취재2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