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사설 독자마당

백세각 스토리/봉강서원 청마루의 비밀(1)(유림단 독립운동 실기를 중심으로)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8.07.24 11:38 수정 2018.07.24 11:38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 있는 백세각은 조선 전기의 문신 야계 송희규가 사헌부 집의로 있으면서 명종의 외삼촌인 영의정 윤원형과 이기를 탄핵하다가 귀양살이를 하고 돌아와 1561년(명종16년)에 지은 건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돼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공산(恭山) 송준필을 위시한 문인들이 독립청원장서 3천장을 복사했다고 전해지며, 또한 경북 유림단 파리장서 사건의 모의 장소로 사용돼 3.1독립운동과도 관련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편집자 주】



ⓒ 성주신문


↑↑ 이 득 균
스토리작가·동화작가
ⓒ 성주신문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 했던가? 입춘이 지난 지 이미 한참이 지났지만, 아직 한 겨울이었다. 인근(宋寅健)은 대청을 내려서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봤다. 근심이 서린 듯 먹구름이 잔뜩 낀 모습이었다. 상복 안으로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에, 앞마당에 심어진 회화나무도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귀신을 쫒고 행복을 불러들이는 소박한 기원 외에도, 밀원이 턱없이 부족해지는 한여름에 꽃대가 휘어질 정도로 꽃을 피워 벌과 나비의 허기를 달래주는 의로운 나무였다.

하지만 사실을 따지고 보면, 이 한파는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 이후 한 번도 가신 적이 없었다. 나라를 강탈한 후 나날이 기세가 등등해지는 일본과 거기에 빌붙어 일신의 영달을 취하려는 매국노들을 보면서 백성들의 가슴은 한겨울처럼 꽁꽁 얼어붙었다. 그러는 동안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독립의 기운이 요원해진 데다, 오히려 1919년 1월 21일 태상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한파는 그 절정으로 치달았다. 참으로 하늘이 울고 땅이 요동칠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태상황제의 서거 소식은 사흘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백세각에 전해졌었다. 교통과 통신이 불편한 벽지에 있는 까닭이었다. 인근의 부친 송준필은 생가(生家) 상(喪)의 심제(心制)로 인하여 여막에 있다가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망국의 한을 품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선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신의주에서 회향한 적이 있던 그로서는 가슴을 쥐어뜯을 일이었다.

하지만 공산은 이내 냉정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문중 소년들을 곧장 앞뜰에 모았다. 분노와 복수는 나중으로 미루어도 되는 일이나, 사대부로서 예를 다하는 것은 바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공산은 북쪽을 향해 제례와 곡을 마치자 다시 종가의 일가친척을 모아 국제사(國制事)를 논의했다. "왕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리가 춘추(春秋)의 첫째 경계(境界)이다. 오늘날 우리가 어찌 나라가 없다고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저 태상황제는 40년이나 군림하신 은혜가 있으므로, 예의 뜻이 어떠함을 물을 것 없이 백성의 도리로 헤아려 보건데, 복을 입지 않는 자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또 태상황제는 손수 종사를 남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만약 손수 타인에게 주신 것이라면, 이렇듯 상복을 입는 일에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공산이 좌중을 돌아보며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단연코 복을 행하겠다는 의지가 내재되어 있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더없이 매서운 때라 그런 행동을 실행하기에는 용기 아닌 용기가 필요했다. 좌중의 한사람이 그러한 상황을 떠올리게 하며 어렵게 입을 뗐다. "지금은 모두 후환이 두려워 몸을 움츠리는 세상이니, 우선 동정을 살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공산의 결심에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다. "우리는 공부를 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할 따름이니, 저 밖에서 오는 화복을 어찌 따지겠는가?" 드디어 변고를 들은 지 6일째 되는 날, 공산은 수십 인을 대동하고 성복(成服)한 채 곡을 의례와 같이 하였으니 바로 1월 29일이었다. 인근이 아직 상복을 입고 있는 까닭이었다.

태상황제의 인산일(因山日)이 지난 며칠 뒤에 이달필이 백세각을 찾아왔다. 그는 현풍 승호 출신의 유생이었는데, 국상을 통한하여 상경했다가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을 선언하고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려한다는 계획을 듣고 이를 알리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와 있었다.

"인산례를 행할 때 조상하는 한국인이 수십만 명이었는데, 백립(白笠)이 하늘을 덮고 눈물이 시내를 이루었습니다. 그때 손병희 등 33인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여 각처에 배포하고 난 뒤, 각급 학교 학생들과 각 종교단체 사회단체, 개인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 소리를 외쳤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맨손으로 싸우다 앞을 다투어 죽어도 또한 후회하지 아니하였으니, 하늘의 뜻이 화를 뉘우치고 사람의 마음이 단결되었음을 이미 알 수 있었습니다. 사방을 에워싸고 바라보던 외국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면서, '아, 이로써 일본이 그동안 세상을 속여 왔다는 것을 알았고, 한국 사람들이 일본에 심복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이 정도이구나.' 하였습니다."

이달필은 마치 현장을 눈앞에서 펼쳐 보이듯, 그때의 상황을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한껏 고조된 음성이 아직 그 날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았음을 알게 해줬다. 공산은 낮은 신음을 뱉어내며,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그러자 그가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이 백세각을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지금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열어 약소국가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하는데, 이는 실로 천 년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서울을 비롯하여 밖으로 이름난 도시 및 큰 항구에 이르기까지, 비록 무식한 부녀자와 어린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모두 환호하고 고무하여 우리의 충정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소위 유림이란 사람들은 문들 닫아걸고 엎드려 있으면서 막막하게 소식이 없으니, 어찌 통탄스럽지 않겠습니까? 선생과 같은 분이 어찌 선두에서 거의(擧義)하여 우리 당의 선봉이 되지 않으십니까? 천하에 대의를 밝히고 후세에 명성을 세워 우리 조선이 오백 년 동안 유교를 숭상하고 문교를 높인 뜻을 보답해 주십시오."

이달필의 진심어린 충언에 공산이 비로소 옷깃을 여미고 대답했다. "나는 촌구석에 사는 미천한 인물로서 진실로 이런 책임을 감당하기에는 부족하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 허름한 옷과 하찮은 음식으로 이 세월을 구차히 지내고 있는 것이 어찌 본뜻이겠소? 진실로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서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 큰일을 할 수 없었던 까닭에 울분을 머금고 아픔을 참아가면서 밝은 하늘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던 것이오. 지금 천년에 한 번 있는 기회가 왔으니, 우리가 한 번 종노릇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 참으로 좋겠소. 다만 지금 나는 상주의 몸으로서 경솔하게 스스로 거사하기는 아마도 적절하지 못한 듯하오. 천천히 다시 방법을 생각도록 합시다."

이달필은 공산이 자신의 뜻을 흔쾌히 받아들이자 기쁜 마음으로 백세각을 떠났다. 이튿날 손님이 조금 뜸한 사이에 공산은 인근과 인근의 종형인 송회근, 아우 송수근, 일가인 송규선, 송인집 등을 백세각에 모았다.

한동안 아무도 선뜻 입을 떼려하지 않아 방안의 분위기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왜 공산이 이런 자리를 마련했는지 모두 짐작을 하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공산역시 한참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저 이달필이 말한 그 일은 의리에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나부터 선창하면 상(喪)을 소홀히 하는 죄가 되지 않을까 심히 두렵다. 그대들은 각자의 의견을 말해 보지 않겠는가?"

인근은 공산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 조심스럽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만일 이 일이 밖으로 새어나간다면 뜻은 펴지 못하고 큰 화근만 취할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중하고 또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공산이 헛기침을 한 뒤 소리를 가다듬었다.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산 것 같고,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다. 우리가 어찌 화와 복으로써 관심을 두겠는가. 생각건대, 우리가 지금 행하려는 일은 바로 선인이 뜻하시던 바였다. 선인이 뜻 두신 바에 어찌 힘을 다해 이어가지 않겠는가? 나의 뜻은 이미 결정되었다. 나를 따를 사람은 누구인가?"

송규선이 공산의 말에 화답하듯 앞으로 나섰다.

"제가 비록 무능하지만 그 뜻을 받들어 주선하겠습니다."

송규선은 문중에서 공산 다음가는 어른이었으므로 충분히 자격이 있고도 남음이 있었다. 공산이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수근을 돌아봤다.

"회당(晦堂) 장선생(張先生)은 우리 고을의 원로이다. 네가 내 편지를 품고 가서 뵈옵고 이 일을 돕도록 말씀드려라."

송수근은 공산의 명령이 워낙 지엄해서, 촌각을 다투어 이행했다. 그가 가지고 간 그 편지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엎드려 생각건대, 경서를 연구하시기에 기체 후 평소와 같이 평안하시옵니까? 이번 일은 가히 천 년에 한 번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인데, 사람의 일이 거기에 부응하지 못하면 열강(列强)들의 관심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우리 유림된 자들이 정히 눈을 부릅뜨고 담(膽)을 키워 한 편지를 써서 대의를 밝혀, 한덩이 붉은 피로 하여금 천하만국에 유입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한다면 훗날의 성취가 비록 하늘의 뜻을 되돌리고 해를 떠받들도록 됨은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오백 년을 배양해온 교화에는 조금이나마 보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학문과 덕망이 남에게 신망이 있는 자가 선봉장이 되지 않는다면, 또한 일이 성사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평소에 깊이 생각하던 것이라 삼가 말씀드립니다. 진실로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신다면, 제가 비록 상주의 몸이지만, 또한 노둔한 재주를 다하여 밑에서 만분의 일이라도 돕도록 하겠습니다……"

한 걸음에 회당에게 달려갔던 송수근은 이내 돌아와 공산에게 그 결과를 알렸다.

"회당 옹이 함께 일할 것을 응낙하였습니다. 그분의 주된 논리는 총독부에 투서하여 나라를 돌려달라고 꾸짖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습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지적재산권은 작가에게 있음.


저작권자 성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