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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독자마당

함께 읽는 詩 한편 - 부화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19.11.26 10:08 수정 2019.11.26 10:08

↑↑ 박 덕 희
작가
ⓒ 성주신문


사과를 사과라고 부르면 사과가 사라진다 노트에 사과라고 적었다 사과는 기척이 없다 사과는 죽고 우리는 사과의 무덤을 사과라고 읽었다 사과는 사과 속에서 나와 사과를 넘어 사과 아닌 것들에게 가 있다 죽고 싶은 데로 가 버리는 사과들 사과를 시로 썼지만 사과가 없는 채로 썼다 사라진 사과들은 이상하게 타인의 무릎 위에서 비 맞은 흙 속에서, 혹은 북유럽 관목 숲에서 쏟아지는 눈 속에서 찾아냈다

파꽃을 그리는 화가에게 들었다 파꽃을 그리면서 수년 동안 파꽃을 무참히 죽였다고

어떤 날은 밤새 부스럭거린다
사과들이 발생하고 있다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민음사(2019)




나는 과수원집 딸이었다. 내게 사과란 사과라기보다는 아부지에 대한 회상이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 학교에 가려면 집에서 개울을 건너 사과밭 옆 자갈길을 지나 좁은 논두렁을 한참 걸어서 가야 했다. 사과밭 옆을 지날 때면 여동생과 나는 사과를 한 알씩 따먹었다. 농약을 친 며칠은 아부지가 학교로 향한 우리가 과수원을 다 지날 때까지 지켜보았다. 한 날은 힐끔 뒤돌아보니까 아버지가 뵈지 않아 여동생을 얼른 업고는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를 따게 했다. 주먹만 한 파란 사과 끝에 동그랗고 하얀 농약 자국이 말라붙어 있어도 얼마나 먹고 싶었던지. 어험! 아부지는 어느새 우리 자매에게 경고를 했다. 그렇게 농약 칠 때마다 여동생과 나는 그 무겁고 기다랗고 기다란 노란 농약 줄을 아부지가 당기라면 당기고, 멀리 있는 나무에 약을 치려고 줄을 풀라고 하며 낑낑거리며 풀었다. 그 보답으로 우린 새빨간 홍옥을 이가 시리게 먹을 수 있었다. 그때는 국광이니 홍옥이니 흔하던 이름을 지금은 들어본 지가 오래되었다. 시원하고 싸하던 농약 냄새 배인 젊은 아부지가 오래되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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