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사설 독자마당

인재(人材)가 바로 국운 - 여환주

성주신문 기자 입력 2025.01.07 09:33 수정 2025.01.07 09:33

ⓒ 성주신문

 

조선일보 주말 섹션 아무튼 주말(2024. 11. 23)에 '일본사를 공부하는 CEO'라는 제목의 인터뷰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수산그룹 정석현 회장(73세, 1951년생)은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가난한 농부 집안 출신이다.

5.16 장학금으로 20리 떨어진 오수중학교에 다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빨리 취직해서 돈을 벌려고 전주공고 기계과에 입학했다. 197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대건설에 고졸 공채로 입사 후, 상사들의 배려로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야간으로 다녔다. 과장 대리 때 정주영 회장 결재를 받으러 다니며 정 회장이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은 사실을 알고는 "사업이라는 게 학력보다는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고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가 더 중요하구나."라고 깨달았다. 1979년 대학을 졸업하고 미래를 고민하다가 바로 사표를 내고 공구 판매상 '석원상사'를 창업했다.

중화학공업 건설 붐이 일었을 때 현대건설에 다니면서 어떤 현장에 어떤 공구가 필요한지 알았기에 필요한 공구를 예상해서 구매한 뒤 수요가 있을 때 내놓으면 다 팔렸다고한다.

그걸 시작으로 지금의 7천억대 수산그룹으로 성장했다. 수산그룹 이름은 자기 고향인 장수군 산서면에서 한자씩 따왔다. 1997년 IMF 때 동남아 플랜트 현장에서 어마어마한 환차손이 발생했다. 발주처가 선처해 줘서 위기를 넘겼는데, 그때 대기업 의존형 하청 사업은 하지 말자. 대신 대기업이 찾을 수 있는 기술특화 제품을 만들어야 하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2008년에는 KIKO(제1금융권이 판매한 환 헤지 파생 금융상품, 환율 급상승으로 대규모 도산사태가 벌어짐) 사태로 3년 치 영업이익을 손실 방어에 쏟아부었다. 회사가 망할 뻔했다. KIKO 사태 때 무리하게 활동하다 간경화가 왔다.

그는 7년동안 출근을 하지 못했다. 독한 약의 주사와 미국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고 마침 신약이 나온 덕분에 지금은 완쾌되었다고 한다. 7년 만에 회사에 출근해 보니 경영이 더 좋아져 있었다. 그동안 정 회장은 새벽부터 밤까지 닥달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전문경영인이 합리적이고 자율적으로 잘해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인재를 기르고 그 인재들에게 믿고 맡기면 되는구나!" 하는 사실을 또 깨달았다. 지금은 일상적인 결재는 전문경영인들 전결로 처리한다.

그를 통해 나의 어릴 적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정석현 회장보다 4년 먼저 이 세상에 태어나 40여 호가 되는 조그만 농촌 마을에서 자랐다. 이때 우리 마을에서 논 30마지기(6천평) 이상을 가진 집이 4가구였다. 이 집들을 나름 동리에서는 부잣집으로 불렀다. 나머지 집들은 10마지기(2천평) 내외로 모두 영세농이었다. 우리집도 10마지기 정도 영세농이었다. 그런데 그 집에 자식들이 4~5명씩은 되었다. 그러니 다음 세대는 모두 영세농일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우리 세대는 "어떻게 먹고 살지?" 하는 생각이 떠 오르기도 하였다.

이때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는 의무교육이니까 모두 내 또래 친구들이 학교에 다녔으나(개중에 입학을 못한 친구도 있음) 중학교 진학은 학교 성적과는 무관하게 가정형편상 절반 정도만 하였다. 고등학교 진학 또한 그중 절반 정도만 하였다. 이러니 나는 대도시로 유학은 엄두도 못 내고 중학교는 6㎞ 정도 떨어진 곳에 걸어서, 고등학교는 14㎞ 정도 떨어진 곳에(군청 소재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부모님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하였다.

나는 특별한 재주를 타고난 것도 아니고 특별히 도회지에 아는 사람도 없으니 오로지 내 실력으로 국가에서 인정하는 공무원이 되는 길이 내가 살 길이라고 생각하여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부산에서 공직생활을 하였다. 군대를 다녀온 후 서울시 공무원 공채로 근무하면서 마침 정부에서 학비가 거의 무료인 서울대학교 부설 한국방송통신대학이 개교하여 행정학과에 입학, 늘 감사한 마음으로 직장 일과 학교 공부를 병행하였다. 그 뒤 나의 직장 일과 학교 공부는 계속 이어졌다. 수산그룹 정석현 회장 이야기를 하다 보니 큰 자랑거리도 없는 나의 이야기도 하게 된다.

정석현 회장은 투병 중이던 2011년 이광훈 작가(2020년 작고)가 쓴 '상투를 자른 사무라이'를 읽었다. 이 책은 메이지 유신과 한일관계를 다룬 저서다. 이 책을 읽고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과 근대화를 시도도 해보지 못한 조선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궁금해졌다고했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일본은 세계적 강국으로 성장했다. 또 과학기술의 중요성과 외교력을 대하는 국가 지도자들의 태도를 배우게 됐는데 과학기술이 곧 국력이라는 사실을 이때 사무라이들이 절감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때까지 일본도 쇄국 정책을 쓰다가 1853년 미국함대가 도쿄 앞바다에서 대포를 쏴댄 것을 보고 서양을 배척해 나라를 지키는 소양이(小壤夷)가 아니라, 교류를 통해 서양 기술을 배워서 서양을 제압하는 대양이(大壤夷)가 진짜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각성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나는 고등학교 대 선배님이 읽어보라고 한 '한일 근대인물 기행'(박경민 저)이 생각났다. 한일 39인의 치열한 삶은 어떻게 양국의 운명을 갈랐나를 저술한 책이다. 이 책은 1800년대 일본의 선각자들은 유럽 유학(개화)을 할 때 우리 조선은 당파싸움과 쇄국정책을 펴고 있었으니 고대사에서는 우리가 일본을 앞섰으나 근대사에서는 한일의 국력 차이가 그대로 나타나 일제 강점기를 맡는 비운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인재(人材)가 국운이다. 지도자의 인재 용인술이 국운이다. 과학기술을 진보시킬 수 있는 인재의 총합이 국운이다. 그게 국운이 상승하느냐 쇠퇴하느냐를 결정한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패전 후에도 인재를 양성해 원천 과학기술을 확보하면서 패전국에서 자유 진영 강대국으로 부활했다. 우리나라는 5·16 이후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과학기술인을 양성했다. 기업가 정신을 고양하고 수출을 장려했다. 이게 한강의 기적을 이룬 동력이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에 성공한 스토리보다 더 극적인 성취이다.

지난 7월 한국수력원자력이 체코 두코바니 원전건설 우선 협상자로 선정되었다. 원자로 시공은 대우에너빌리티, 그리고 발전소 주기기인 원자로 자동제어시스템(MMIS) 제작 및 운용은 정석현 회장의 수산 ENS가 맡았다.

이 MMIS 기술을 확보하는 순간 원전 자립 100%가 달성되었다. 이 기술은 개발착수에서 현장검증까지 22년 걸렸다. 나라에서도 1천억 원 넘게 지원하고 긴 시간을 기다렸다. 20년 넘게 연구소 석·박사 인재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기술을 확보하는 것은 수산그룹 개인의 자산이라기보다 우리 국가의 자산이다. 국가는 이러한 기업이 다수 출현할 수 있게 지원하여야 할 것이며, 우리 국민 모두는 어떻게 하면 국익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한 개인의 발전은 곧 국가의 자산이다. 특히 나는 공직자로 평생을 근무했기에 그런 생각이 더 견고했다. 자신을 위해 주경야독하며 박사학위까지 취득했지만 나의 노력이 업무에 미칠 더 큰 꿈이 있었다고 하면 내 자랑이 될까.

인재가 국력이라는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깨닫는 기사였다.



저작권자 성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