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 환 주 전 재경성주중고 동문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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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끝난 이듬해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시골 면 소재지 학교(大家)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하여 학교 이름도 대서(大西)라 불렀다.
학교에 입학하여 보니 본관 건물에 교실이 4개 정도라 1학년과 4학년 교실은 본관 뒤편에 가건물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당초 논을 학교로 만들면서 지반 정리가 완벽하지 못해 가건물이 넘어갈 듯해 수시로 바로 세웠다. 교실 바닥은 맨땅이라 책상과 의자는 고사하고 가마니를 깔고 공부를 하였다. 이때 기억에 남는 것 중 1학년 교실과 4학년 교실에 유일하게 목재로 작은 평상을 만들어 가마니가 아닌 나무 평상에서 공부하는 학생이 있었다. 바로 나의 4촌 형과 나의 동갑 4촌 동생이다. 큰아버지의 자식 사랑의 유별남이라 할까? 자식 사랑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겠다.
또 하나는 4학년 교실 벽에 학습자료로 붙어있는 글씨를 나도 한글을 깨우쳐서 입학한지라 읽고 있는데, 내 등 뒤에서 그 글씨를 나보다 더 빠르게 유창하게 읽는 아이가 있었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와 걸어서 다닐 수 있는 중학교에서 늘 학년 전체에서 1등을 하여 고등학교는 지방 대도시에서 가장 뛰어난 학교로 진학하였다.
1학년이 끝나고 2학년 때는 본관 교실에서 공부한 것으로 기억하나 3학년 때는 교실 증축 중에 있어 학교 운동장 천막 안에서 공부한 기억이 아직도 또렷이 남아있다. 학교 운동장 철봉 밑 모래사장에는 모래가 제대로 깔려 있지 않아 수업 시간에 학교 가까이 있는 하천에서 모래를 운반하여 모래사장에 보충한 기억과 송충이(솔나방)를 잡으러 다녔던 기억도 남아있다. 6학년 때는 학교 외곽에 담장이 없어 철조망을 학교에서 구매한 후 우리 학생들이 그 설치 작업을 한 기억도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학생들에게 어떻게 그런 일을 하는 생각도 든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절반 정도의 학생들이 초등학교와 가장 가까운 중학교(공립)로 입학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추석날 사라호 태풍이 있었다. 이 태풍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지금까지 가장 큰 태풍으로 기억하고 있다. 또 6학년 겨울방학 무렵 내가 입학할 중학교 본관 건물이 화재로 전소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다는 들뜬 마음으로 중학교에 입학하고 보니 강당 건물과 학교 부속 건물만 남아있고 교실이 있었던 본관 건물은 불에 탄 채 건물 기초 위에 깨진 기와 조각만 남아있었다. 또 전 해 사라호 태풍으로 운동장이 1/3이 떠내려간 상태였다.
이러한 상태이다 보니 1학년 때는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불에 탄 교실 정비 작업과 학교 운동장 복구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이때 당시 교감선생님이 이북 말씨로 "엊그제 불도저 왔다. 학생들은 가까이 가지 말 것"이라고 하시던 말씀이 아직도 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학교 운동장 정비는 2학년 때까지 이어졌고 3학년 때 새로 신축한 건물(일부 교실 2개)에서 공부한 기억이 있다.
이러한 학교가 내가 졸업하고 10년이 지났을 무렵에는 고등학교까지 생기고 한 학년에 학급수가 4-5개였다가 지금은 농촌 인구 감소와 저출생으로 인해 초·중학교가 모두 폐교가 되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를 했지만 그 학교가 있어서 오늘의 내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3-4년 전 내가 중학교 동기회장으로 있을 때 모교 인근에서 점심 모임을 한 후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우리가 어렸을 적을 회상하며 운동장을 걸어 보았다. 학교 건물은 3층으로 아주 훌륭하게 지어져 있는데 학생이 없다니…
우리는 어려웠던 시절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를 하였지만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았건만 지금의 농촌 사회는 젊은이와 아이가 없다니 우리의 농촌 사회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운동장에서 학교 건물을 배경으로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헤어진 일이 있었다.
이때 교실과 만나는 운동장 가장자리에 단을 높게 하여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교장 선생님의 공덕비를 보고 한 친구가 "우리 학교 다닐 때 수업 시간에 학교 정비 사업에 몰두하게 한 분이 무슨 공덕비냐?" 하며 불평을 하였다. 이 친구의 말이 일리가 있는 말이지만 그때 어려웠던 시절 학교 예산도 없는 형편에서 재학생을 동원하여 학교 정비를 하였기에 그 후 우리 후배들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