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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화랑 원화의 원류(原流) 박제상 부자(父子)-上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4.21 19:33 수정 0000.00.00 00:00

화랑 원화의 원류(原流) 박제상 부자(父子)-上

연일 찔끔 비가 봄을 부르고 있다. 시냇가 버들가지에는 버들강아지가 뽀얀 입술을 살포시 내밀고 어리둥절 계절을 엿보고, 이젠 얼음이 풀어진 비단 같은 맑은 물은 제법 봄꽃을 흥분시키고 있는 듯하다. 산수유 핀 골짜기는 백매화가 만발하고, 홍매화마저 참았던 기지개를 켜면 “나리 나리 개나리♬” 놀라서 숨 멈추고, 목련꽃 향연을 벚꽃과 함께 다가서면서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시샘 한기(寒氣)를 보내어도 계절은 꿈쩍없이 그 길을 간다. 오늘은 계절이 화랑답다.

신라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에서 만고의 충신으로 추앙을 받는 이는 박제상(朴堤上: 363~419년)이 유일할 것이다. 그는 신라시조 혁거세의 후손으로 파사이사금의 5대손이며, 조부는 아도 갈문왕이요, 아버지는 물품 파진찬이라고 ‘삼국사기’는 전(傳)을 지어 전한다. 또한 영해박씨의 실질적 시조라고 하며, 이 문중에서 간직해온 ‘부도지’는 박제상이 지은 그의 사상서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물론 우리나라의 식자들은 새로운 책이 나타나면 일단 위서라고 지목하고 쳐다보지도 않지만 말이다.

그는 삽량주(지금의 경남 양산) 간(干)으로 있기도 하는데, 이보다 앞서 실성왕 원년 ‘402년,삼국유사에는 내물왕 36년(390)으로 기록되어 있다’에 왜와의 강화정책으로 내물왕의 셋째 아들 미사흔(삼국유사에는 미해)을 볼모로 보내고, 뒤이어 고구려와의 강화로 동왕 11년 ‘412, 삼국유사에는 눌지왕 3년(419)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에 내물왕의 둘째 아들 복호(삼국유사에는 보해)를 볼모로 보내게 된다. 후일 왕위에 오른 눌지왕(내물왕의 첫째 아들)의 왕명을 받은 제상은 먼저 고구려로 가서 복호를 구하고 돌아왔으나, 눌지왕은 바로 밑의 동생 미사흔을 얘기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에 제상은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바로 속포(지금의 울산)에서 배를 타고 왜국으로 떠나버린다. 이 소식을 들은 제상의 부인은 통곡을 하며, 망덕사 앞 장사에 양다리를 퍼뜨리고 일어서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후일 사람들이 이곳을 벌지지(伐知旨)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제상의 부인을 국대부인으로 삼고, 그 딸을 미사흔(미해)의 부인으로 삼았다고 한다. 제상이 왜국에서 미사흔을 탈출시키고 붙잡히자, 왜왕은 자신의 신하로 삼고자 하나, 제상은 “차라리 계림의 개돼지가 될망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차라리 계림의 매를 맞을지언정 왜국의 벼슬과 녹은 받을 수 없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을 한다. 왜왕은 노하여 제상의 발바닥 가죽을 벗기게 하고 갈대를 예리하게 베고는 그 위를 달리게 하는 형벌을 가한다. 이 일을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지금도 갈대 위에 피 흔적이 있는 것을 세상에서는 제상의 피라고 한다”라고 적고 있다. 아마도 원나라의 간섭기를 살다간 일연은 우회적으로 이민족에 대한 적개심을 나타내면서, 아울러 백성들에게 충성심을 고취시키는 이중적인 의미로 박제상의 충절을 얘기하며, 그 아내와 세 딸들 모두 망부석이 되었다는 것으로 절개를 지키는 하나의 표상으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경남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에 있는 효충사를 찾아 길을 나섰다. 예상은 하였지만 찾아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을뿐더러 주민들에게 길을 물어도 고개만 가로 저을 뿐 말이 없다. 자신의 뿌리에 대한 무관심은 곧 애향심도 심각하게 무너진다는 평범한 진리를 또 한 번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곳을 양산시에서는 대대적으로 성역화 한다는 것을 며칠 전 언론에 발표를 하였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대적으로 성역화하지 않으면 찾아가는 이정표도 만들지 않아야 하는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자체의 ‘내 고장 알리기’의 수준을 보는 것 같아 입맛이 씁쓸하다.

여러 차례 길머리를 다시 잡아 겨우 효충사에 들렀다. 조그만 건물하나에 비석 하나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건물 안을 쳐다보니 더욱 기가 막혀 말문이 닫혀져 버린다. 얼마나 방치를 했는지 영정을 모신 탁자는 먼지투성이고, 바닥은 무너져 잘못하다간 참배객들이 안전사고라도 일으킬만 하였다. 영정 두 개가 모셔져 있지만 어느 것이 박제상의 것이고, 어느 것이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그 아들 백결선생 것인지 표식이 없다. 꼭 금싸라기 예산을 축내어야만 간단한 청소라도 할 수 있는 지 관계자에게 진정으로 묻고 싶다. 제발 이제라도 대대적 성역화는 그때가서 하고, 지금 있는 유적이라도 깨끗하게 유지하여 찾아오는 탐방객을 맞이해야 되지 않을까.

제각(祭閣) 마당엔 단출한 비가 하나 덩그렇게 서있다. 한문학에 조예가 없는 사람도 능히 발견할 수 있는 반가운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화랑도의 세속오계(世俗五戒)였다. 왜 박제상과 그 아들 백결선생을 모신 제각의 비에 화랑의 세속오계가 들어 있을까. 백결선생의 자취를 찾아보면 해답이 보일성도 싶다.

박 진 환 프리랜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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