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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화랑 원화의 원류(原流) 박제상 부자(父子)-下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4.22 15:32 수정 0000.00.00 00:00

비가 봄비가 아닌 꽃밭의 향연을

화랑 원화의 원류(原流) 박제상 부자(父子)-下

 
↑↑ 치산서원
ⓒ 경주신문사 

비가 봄비가 아닌 꽃밭의 향연을 시샘이라도 할 듯이 목련 봉오리를 사정없이 할퀸다. 가만히 벌린 목련 꽃잎에 가득 찬 빗방울이 바람에 흔들려, 그만 꽃잎을 땅으로 직행을 하게 한다. 빗물이 질펀한 흙탕길에 놓인 하얀 목련 꽃잎이 하나씩 하나씩 그래도 고고한 기품을 마지막까지 내려놓지를 않는다. 한 걸음 한 걸음 피해서 내디뎌 보지만, 안타까움이 눈가를 물들게 한다. 잠깐의 화려함을 위해 동지섣달 인고의 세월을 참고, 잎도 피기 전 꽃잎부터 피어나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 옛날 화랑 원화의 아름다움이 이와 같았으리라.

만고의 충신 박제상에 대해 조선조 현군의 대명사, 세종대왕은 “신라 천년에 으뜸가는 충신이다”라고 하였고, 조선 후기 문예부흥을 주도한 명군 정조대왕은 “그 도덕은 천추에 높고 정충(貞忠)은 만세에 걸친다”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물론 배신과 사기가 온 세상을 뒤덮은 것 같은 혼란을 살아가는 현금의 사람들도 역시 만고의 충신으로 숭앙을 하지만 말이다.

충신 박제상과 백결선생이 부자지간이란 것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 그 어디에도 없다. ‘삼국사기’ 열전 박제상전에는 제상의 가계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둘째 딸을 미사흔(未斯欣)에게 시집보낸 내용이 말미에 적어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박제상을 김제상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의 가계에 대한 내용이 없다. 다만 보해(복호)와 미해(미사흔)를 구출한 공으로 제상의 부인을 국대부인(國大夫人)으로 삼고, 그의 딸로써 미해공의 부인을 삼게 하였다는 기록과 ‘얼마 뒤에 부인이 못 견딜 만큼 그 남편을 사모하여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다보고 통곡을 하다가 죽었다. 이래서 치술신모가 되었으니 지금도(일연스님 당시) 이곳에는 당집이 있다’라고 전한다.

‘화랑세기’에는 황아(皇我)는 눌지왕의 딸이고, 그 어머니는 치술공주인데, 실성왕의 딸이다. 제상공(堤上公)에게 시집을 가서 삼아(三我)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 세 가지 서책에는 박제상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모두 공통적으로 딸이 있었다는 말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박제상과 백결선생이 부자지간이란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것은 ‘부도지’란 책이 발견되고 난 뒤부터라고 한다. ‘부도지’는 영해 박씨 문중에 그동안 비전(秘傳)되어 오던 것을 6.25 전란 때,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박금(朴錦)씨가 연구하던 기억을 더듬어 편찬한 책이라고 한다. 아직까지 학계에서는 사료적 가치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보면 내물왕이 죽었을 때 세 아들(눌지, 복호, 미사흔)이 어렸기 때문에 화백회의에서 실성이 보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자 첫째인 눌지는 거짓으로 미친 척 행동하여 살아남았지만, 둘째 복호와 셋째 미사흔은 실성왕에게는 눈에 가시거리였다. 그래서 실성은 복호와 미사흔을 강화정책의 일환으로 고구려와 왜에 인질로 보내버린다.

이런 실성의 왕권강화정책에 제상은 분연히 일어나 “이는 화백회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여론을 일으켜, 신자천(申自天), 배중량(輩仲良) 등 육신(六臣)을 총 사퇴하게 만들고, 뒤이어 실성이 눌지에게 왕권을 평화 이양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기존 사서의 기록은 내물왕에 의해 고구려에 인질로 가게 되었던 실성은 왕위에 오르자, 내물의 아들인 복호와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어 자신이 당한 원한을 갚으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고구려의 국제질서 논리에 의해 실성을 죽이고, 눌지를 왕위에 올려놓았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부도지’의 발견으로 박제상과 백결선생은 부자지간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박제상이 영해박씨 시조이며, 호는 관설당이라고 한다. 또 그 아들 백결선생은 자비왕대에 이벌찬 벼슬을 지낸 문량이라고 한다. 한 집안에 내려오는 비서(秘書)가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그래도 그냥 아니라고 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백결선생은 방아타령으로 유명한 현금(玄琴)의 명장이었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가난한 백결선생이 명절이 다가와도 음식을 준비하지 못하고 상심하는 아내를 위해 ‘방아타령’을 지어 위로했다고 한다. 또한 백결은 화랑과 원화들의 ‘현실(玄室) 교육’의 틀을 확립한 대종사(大宗師)였다고 한다. 현실(玄室)이란 피라미드 속을 한자로 나타낸 것이 라고 하는데, 이 현실(玄室) 안에서 화랑과 원화들에게 밀실 환경을 만들어 놓고, 방아타령을 현금으로 연주하여, 그들에게 높은 정신적 수양을 하게 하였다고 한다.

지금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가면 박제상과 그의 부인 치술신모를 위해 사당을 세웠던 터에 조선시대에 와서 서원을 세웠는데 이곳이 치산서원이다. 양산시 상북면 소토리 효충마을에 효충사가 있고, 외동면에 치술령과 망부석 은을암 등 충신 박제상과 관련된 유적이 곳곳에 있다. 박제상과 백결선생이 부자지간이던 아니던, 두 분의 높은 충절과 청소년 교육을 위해 몸 바쳤던 올바른 의식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박 진 환 프리랜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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