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more
사회/문화 사회종합

돌매못 안쪽 ‘못안’ → ‘제내(堤內)’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4.22 16:06 수정 0000.00.00 00:00

신라충신 박제상이 살던 곳

돌매못 안쪽 ‘못안’ → ‘제내(堤內)’
신라충신 박제상이 살던 곳

외동읍 제내1리(堤內一里)

경주는 지금 활짝 핀 벚꽃으로 인해 거리는 온통 하얀 꽃물결로 춤을 춘다. 전국에서 가장 많은 벚나무를 보유하고 있는 경주의 봄 거리는 하얀 벚꽃과 노란 개나리가 펼쳐진 군무는 아름다운 봄의 향연으로 길손들의 발걸음을 놓아주지 않는다.

외동읍 제내리로 가기위해 경주에서 7번 국도를 따라 불국사로 가는 길가에도 만개한 벚꽃들이 포도위에 길게 터널을 이루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몇 일간 반짝 피었다 지는 아쉬움 때문일까, 아님 일본국화이기 때문일까, 천년고도 경주의 가로수 대부분이 벚꽃인데 대해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제내는 맷돌산(마석산 磨石山) 동쪽기슭에 이루어진 마을로 본래 돌이 많아서 ‘돌매’, ‘토상촌(吐上村)’이라 부르다가 마을 앞 토성계(土城谿)에 돌매못을 막은 후부터는 마을이 돌매못의 안쪽이 되므로 ‘못안’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일제 때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못안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제내(堤內)’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토상촌(吐上村)’과 ‘토성계(土城谿)’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석산 기슭인 이 일대가 돌과 마사토로 이루어져 물이 계곡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거의 땅속으로 스며들어 샘물로 솟아난다. 이 샘물이 솟아난 곳에 못을 막았는데 이 곳을 ‘토성계(土城谿)’라고 했다. 그리고 이 마을이 마석산이 토해내는 샘물의 위쪽에 위치하므로 토상촌(吐上村)이라고 하지 않았나 싶다. 그것은 샘못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을 북토리(北吐里)라고 한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이 샘물을 마석산이 물을 머금었다가 토해내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 토성계 즉 샘못인 돌매못은 형산강과 태화강의 분수령이기도 하다. 마석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곳에서 북쪽으로 난 뱀거랑으로 흐르면 형산강이 되고, 못 아래로 흘러 남쪽으로 흐르면 태화강이 되는 것이다.

돌매못 형산강 태화강 분수령

제내는 불국사를 지나 괘릉에서 아사녀의 슬픈 사랑의 전설을 간직한 유서 깊은 영지를 통해, 방어리와 북토리를 거쳐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난 농로를 따라 가는 게 지름길이다. 연안에서 내남으로 넘어가는 904번 지방도를 이용해 냉천으로 넘어가도 되고, 반대로 내남에서 노곡리를 거쳐 외동으로 넘어가는 길을 이용해도 제내에 갈 수 있다. 경주에서 25km 35분 거리다.

돌매못 서쪽의 못안과 한밭이 제내1리, 사일이 제내2리를 이룬다.
↑↑ 학림정
ⓒ 경주신문사

↑↑ 당목
ⓒ 경주신문사



제내1리 73가구, 82세대에서 주민 161명(남자 78 여자 83)이 생활하고 있으며, 주로 벼농사와 콩, 고추 등의 밭작물을 하고 있고, 축산농가가 많은 편이다. 마을의 50여 농가에서 한우 500두, 3농가에서 돼지 4천500두를 기르고 있다. 이 마을은 10년 전부터 자동차 부품공장이 들어오기 시작해 지금은 10여개의 공장들이 들어서 있고, 지금도 공장 터 고르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마을의 최고령자는 올해 89살의 설병수(괴정댁) 할머니와 동갑내기의 이종필(석계댁) 할머니이다. 설 할머니는 노인정에서 마침 취재중에 만났고, 석호정사 뒷집에 혼자 생활하고 계시는 이 할머니를 찾았다. 넓은 집에 혼자 사신다는 이 할머니는 집안을 정갈하게 가꾸어 놓았고, 아직 허리도 굽지 않을 정도로 건강관리를 잘 하고 계셨다.

들어오는 물 없는 돌매못

ⓒ 경주신문사

못안 마석산(磨石山 : 빼돌산, 맷돌산) 아래에 이루어진 마을로 본래 돌이 많아서 ‘돌매’, ‘석동(石洞)’, ‘토상촌(吐上村)’이라고 부르다가, 마을 앞 토성계(土城谿)에 못을 막고부터 ‘못안’이라 불렀다고 한다. 경주최씨 집성촌으로 30여 가구가 최씨이다.

동제 및 당나무 돌매못 둑에 100년이 넘은 서어나무가 당나무로 있었으나 지난해 죽고, 그 자리에 팽나무를 새로 심었다.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에 동제를 지낸다.

한밭 넓은 밭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한밭’ 혹은 ‘대전(大田)’이라 부른다. 못안 남쪽 마을로 지대가 높고 마사토 지대라 물이 모자라 밭농사를 주로 지었다고 한다. 지금도 대부분이 밭이다. 수안김씨 집성촌으로 20가구가 수안김씨다.

박제상과 임란창의 충신마을

 
↑↑ 제내못
ⓒ 경주신문사 

석호정사(石壕精舍) 육의당(六宜堂) 육의당 최계종(1570~1647)이 광해군 11년(1619)에 세운 별장으로 못안 모정나무숲에 있다. 육의당은 정무공 최진립(崔震立) 장군의 동생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 1594년 무과에 급제했다. 서생포 첨사를 거쳐 남포현감(藍浦縣監)에 임명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에 항거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내려와 이곳에서 후진양성에 힘썼다. 육의정(六宜亭)이라고도 부른다. 그 북쪽에 1994년에 새로 지은 육의당의 위패를 봉안하는 상의사가 있다.

 
↑↑ 상의사
ⓒ 경주신문사 

학림정(鶴林亭) 수안김씨(遂安金氏) 한밭문중의 입향조인 별제공(別提公) 휘 건을 추모하여 그 후손들이 1993년에 한밭에 지은 정자이다. 별제공은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공을 세운 임란창의 의사이다.

박제상의 집 이 마을은 신라 때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 현종 때 철광석을 발견한 구충당 이의립(求忠堂 李義立)의 「구충당일기」에 따르면 ‘박제상의 집은 치술령 뒤쪽 토상제(吐上堤) 부근에 있다’고 하였다. 토상제는 돌매못으로 이 부근에 박제상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웃마을 북토에도 박제상의 말 무덤이 있다. 왜국으로 떠나던 박제상이 자신의 말 발목에 집에 전할 편지를 묶어 말만 보냈는데 북토에 이르러 말이 죽어 이곳에 묻었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따라서 박제상의 집이 이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내리 가마터(堤內里 窯址) 돌매못 둑밑에 있었던 옹기 가마터로 현재 밭이다. 이곳에는 토기의 파편과 탄 흙이 나왔다고 한다.

잉어가 살지 못하는 샘못
↑↑ 육의당
ⓒ 경주신문사



돌매못 돌매 동쪽에 있는 못으로, ‘토상제(吐上堤)’라고도 한다. 이 못은 참으로 특이한 못이다. 일반적으로 못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유입수를 저장할 목적으로 유입수가 많은 계곡아래의 좁은 골짜기를 가로 막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돌매못은 산골짜기를 끼지도 않았고, 흘러드는 거랑조차도 없다. 샘물이 수원이기 때문이다. 물이 워낙 차고 맑아서 잉어가 살지 못한다고 한다.

이 못은 남쪽일부가 작은 동산에 잇대어 있을 뿐, 나머지 3면은 모두 둑으로 만들어진 특이한 못이다.

둑의 길이가 500m는 족히 넘어 보인다. 이 못을 언제 막았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모정나무숲 못안마을 동북쪽 마을 어귀에 있는 소나무 숲으로 석호정사가 있는 곳이다. 본래 무성한 숲이었으나 지금은 4그루의 소나무 고목만 서 있다.

마석산은 본래 맷돌산, 빼돌산


마석산(磨石山 456m) 내남면 명계리와 외동읍 제내리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빼돌산, 맷돌산 이라고도 한다.

사두미산(巳頭尾山) 뱀대가리처럼 생긴 샛골 동쪽에 있는 산.
꾕꾀미 삐알 샛골 북쪽에 있는 산으로 주민들은 지명에 대해서 연유를 모른다. 꾕꾀미는 꽹과리, 삐알은 산기슭을 말한다.
댄삐알 지형이 매우 가파른 산으로, 제내 1,2리 경계지점에 있다.
뒷뻔대기 못안마을 뒤에 있는 산이다.
뒷재 제내 뒤쪽에서 내남면 명계로 넘어가는 고개.
바람잇재 못안 서남쪽에 있는 고개로, 바람이 아주 거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풍현(風峴)’이라고도 한다.
진잿등 못안 서쪽에 있는 긴 등성이.

암캐가 새끼 젖먹이고

구숙곡(狗宿谷) 돌매못 남쪽에 위치한 자그마한 동산에 형성된 골짜기로 암캐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형국이라고 한다. ‘국싯골’이라고도 한다. 냉천산(독지미산) 북편에 있는 작은 산으로 못안 동쪽에 있다.
바랑골 새작골 북쪽에 있는 곧은 골짜기.
새작골 천학골 북쪽 즉 못안 서쪽에 있는 골짜기.
샛골 댄삐알 아래골짜기.
오뭇골 못안 동쪽의 구숙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모양이 오목하다.
점골 철점(鐵店)이 있었던 골짜기로, 못안 서남쪽에 있다.
진잿골 못안 서쪽에 있는 긴 골짜기
천학골 점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마치 학이 하늘로 나는 형국이다.
청석골 청석(靑石)이 나는 골짜기로 새작골 남쪽에 있다.
허재빗골 샛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허재비가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화전골 새작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화전(火田)이 있어 화전골이라고도 한다. 이 골짜기에는 절터가 여러군데 있고 지금도 탑신 등이 남아 있다고 한다.

형산강도 태화강도 여기서부터

뱀거랑 뱀처럼 구불구불한 거랑으로 못안에서 시작하여 북토, 방어, 정래 등으로 흘러 남천내를 거쳐 형산강으로 흘러간다.
불밋거리 옛날에 쇠부리터가 있었다고 하는 곳으로 지금은 논이다. 한밭 앞에 있다.
알라바우 알라(아기)를 업고 있는 것처럼 생긴 바위로, 새작골에 있다.
섬배기 안들 북쪽에 있는 들로 거랑과 거랑사이에 마치 섬처럼 위치한 들이다.
상봇들 상보의 물을 대어 농사를 짓는 들로, 중보 위 서쪽에 있다.
안들 못안 남쪽에 있는 들로 못 위에 있는 들.
못밑들 돌매못 밑에 있는 들로 제일 큰 들.
중봇들 중보의 물을 대는 들로, 못안 동쪽에 있다.

돌매못 물 새어 위험

돌매못(토상지) 둑이 오래되어 물이 많이 샌다. 동쪽은 5년 전에 보수를 했고, 서쪽은 아직 보수를 못했다. 따라서 못이 터질 위험이 있다고 한다. 샘물이 수원인 이 못은 못 전체가 못둑이라 철저한 관리가 요구된다.

이 마을 출신으로는 김수선(73 전 건국대 교수), 김순직(55 서울시 시설관리공단 이사장), 최양식(54 행자부 차관), 최동식(47 서울 변호사) 등이 있다.


저작권자 성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