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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병장기(兵仗器)를 심산(深山)에 묻은 이유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4.22 16:11 수정 0000.00.00 00:00

천년신라의 노래 향가의 발자취를 찾아서-마흔네번째

천년신라의 노래 향가의 발자취를 찾아서-마흔네번째
병장기(兵仗器)를 심산(深山)에 묻은 이유

반짝 반짝 벚꽃 잎이 송이 눈가루마냥 유채꽃위에도 개나리·진달래위에도 하얗게 쌓이고 있다. 보문가는 길은 벚꽃터널이 되어, 최고조의 기분에 냅다 괴성이라도 내지르고 싶다. 정말 세상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희망의 동산이라고 할 만하다. 이런 꽃날이 오면 첫사랑이라도 불현듯 나를 찾을 것 같다. 안타깝다. 나의 첫사랑이 첫사랑의 첫사랑이어야 하는데, 기억이나 할런지, 가슴에 품은 사랑을 그냥 어루만지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일까? 항상 봄이 오면 먼 언덕 위 아련한 곳에는 첫사랑이 솜털마냥 머물러 있으니 말이다.

무장사를 찾아가는 오늘 아침은 발걸음이 마음을 재촉한다. 수없이 생각으로만 머물렀던 곳으로의 기행은 설레임을 피어오르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보문호반은 꽃야성을 이루고 있고, 젖먹이 맑은 눈망울에 벚꽃이 한잎 두잎 지고 있다. 이 봄도 이렇게 곧 막을 내릴 것 같아 괜한 심술이 삐죽이 발아래를 휘감는다. 다시 다잡아 조선호텔 앞 거대한 물레방아를 뒤로 하고 작은 소로로 접어들었다. 개나리가 완연하게 속살을 보여준다. 아니 너울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 어울릴 것 같다. 한참이나 뿌연 황사 길을 더듬더듬 들어가니 암곡동이 산 아래 갇힌 듯 옹기종기 있다.

‘하늘에서 노란 꽃비가 내렸다’, ‘흙비(土雨)가 내렸다’는 ‘삼국사기’ 기사를 보면 황사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봄마다 우리를 찾아온 귀객(鬼客)임에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마을을 벗어나 개울 길을 따라 한참이나 들어가자, 무장사지 2킬로미터란 이정표가 놀란 듯 고개를 내민다. 어디를 가나 우리나라 이정표란 참 난수표 찾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무장사를 가는 길은 개울물이 계속 호위를 해주며 두런두런 이야기로 발길을 이끈다. 길바닥은 온통 굵은 자갈로 되어 있어, 오늘날 웰빙을 외치는 선무당 등산객에겐 안성맞춤이란 생각이 앞선다.

오리(五里)란 이정표를 떠올리며 꼬불꼬불 계곡을 얼마나 올랐는지, 몇 번이나 개울물 징검다리를 건넜는지 모를 때 쯤, 깎아지른 벼랑 위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하게 석탑하나가 황사운무에 가려 언뜻 보인다. 놀라운 탄성이 산하를 메아리친다. 이곳이 무장사지다.

무장사는 통일신라 38대 원성대왕의 아버지 되는 대아간 효양(명덕대왕)이 그의 숙부 되는 파진찬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절이라고 한다. 또한 세간에서 무열왕이 삼한을 통일한 후 병장기를 이 골짝 속에 묻었다하여 무장사라 한다고도 한다.

무엇보다도 신라 39대 소성왕이 즉위 2년 만에 돌아가니 그 왕후 계화(桂花)가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자신이 입고 있던 화려한 의복과 궁중에 쌓아두었던 재물을 털어 이름난 재인바치들을 소집하여, 미타상 등을 조성하였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얼마나 부왕을 잃은 슬픔이 극진했으면, ‘창황스럽고도 지극히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면서 마음이 아프던 나머지 살았을 적에 아름다운 행적을 죽어서 드날리고 그의 명복을 빛나게 하고자 생각하더니’ 라면서 미타전(彌陀殿)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思夫曲’인 셈이다. 왕후라고하나 지아비인 왕이 없는 왕실 생활이란 독수공방에 마음은 수 천리 벼랑에 걸린 외론 신세였을 것이다.

사실 소성왕은 무척 어려운 좁은 길을 거쳐서 왕위에 오른다. 부왕인 원성왕 원년에 아들 인겸을 태자에 봉하나, 7년 정월에 태자가 죽고 만다. 이에 원성왕 8년 8월에 왕자 의영(義英)을 태자로 삼는다. 그러나 10년 2월 의영마저 죽게 된다. 하는 수 없이 원성왕은 11년 정월에 혜충태자(인겸)의 아들 준옹(俊邕)을 봉하여 태자로 삼는다. 그 후 원성왕이 즉위 14년 12월 29일에 붕어하여 왕위에 오른 이가 소성왕이다. 한 임금이 세 번에 걸쳐 태자를 봉했다는 사실은 원성왕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또한 소성왕은 당나라에 봉사(奉使)하여 대아찬이 되고, 파진찬으로 재상에 올랐으며, 시중과 병부령을 지낸 후 태자가 된 독특한 이력을 가진 왕인 셈이다. 비록 왕위에 올라서는 불과 2년을 지내지 못하고 죽게 되었지만, 왕실일원으로서는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린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신라 38대 원성왕대가 되면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게 된다. 이 일을 ‘삼국사기’에는 ‘前日엔 궁술(弓術)로써 인물을 선택하더니 이때에 이르러 개혁했다’라고 하여 그동안은 궁술 즉 무예를 중심으로 인재를 선발하다가 이후론 문재(文才)를 중시해 등용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먼저 31대 신문왕대에 김흠돌의 난으로 화랑을 폐지하고, 국학을 설치하여 새로운 청소년 교육기관을 만들면서 화랑들은 중앙정계에서 멀어지게 되었고, 원성왕대에 오면 완전히 그 자취를 감추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후 화랑들은 그들의 전통인 유오산수를 즐기면서 때론 향가를 지으며 점차 세속과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었다고 여겨진다.

51대 진성여왕대에 와서 대구화상과 각간위홍이 ‘삼대목’이라는 향가집을 편찬했다고 하니 호국무사로서는 잊혀진 존재였지만, 화랑들의 전통인 향가는 꾸준히 창작되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면 그렇게 많이 불렀던 향가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라진 것일까. 아니다. 지금 이 순간도 우리네 가슴 속에는 언제나 그렇듯 향가가 수 없이 창작되고 또한 부르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박진환 프리랜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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