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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오릉에서의 상념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4.22 17:04 수정 0000.00.00 00:00

박혁거세왕 재위시절 로마에서 만들어진 브루투스 화폐

오릉에서의 상념
박혁거세왕 재위시절 로마에서 만들어진 브루투스 화폐

오릉을 다녀오고도 신라의 시조묘는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사람이 간혹 있어서 웃을 때가 많다.
삼국사기를 보면 나라를 다스린지 61년만에 하늘로 올라간 뒤에 7일만에 땅에 떨어지면서 다섯 동강이가 된 박혁거세의 시신을 모으려다 큰 뱀이 방해하는 바람에 있는 그대로 다섯 능을 만들었고 뱀이 나타났다 하여 ‘사릉’이라 하였다고 되어있고, 삼국유사에 의하면 1대 박혁거세왕,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을 모두 ‘사릉원’에 장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오는 ‘사릉원’이 현재의 ‘오릉’과 그 위치가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는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기전에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역사기록에 나오는 사릉원이 현재의 오릉과 일치한다고 해도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상이한 점이 늘 풀리지 않는 의문이고 어쩌면 그러한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기에 오릉 문화재산책은 더 많은 상념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흔히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천년을 넘긴 제국으로 신라와 로마를 비교하곤 한다. 로마제국과 신라왕국, 도시 로마와 서라벌을 비교해 보면 동양과 서양의 고대사의 확연한 차이점에 빠지곤 한다. 십년 터울로 로마를 두 번 가보고 느낀 점 중에 로마와 서라벌 경주는 다르면서도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다.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로마건국신화와 양산 밑 나정에서 하늘로 올라간 백마가 돌 본 알에서 깨어난 혁거세의 신라건국신화로 시작된 고대도시 로마와 서라벌 양 도시는 공히 작은 언덕으로부터 역사가 시작된다.

지중해로 흘러드는 테베레 강 주위에 있는 퀴리날레, 비미날레, 에스퀼리네, 첼리오, 아벤티노, 팔라티노, 카피톨리네 라는 7개의 작은 언덕(구릉)에서 로마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동해로 흘러드는 형산강 지류인 알천, 서천, 남천을 따라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무산대수촌, 취산진지촌, 금산가리촌, 명활산고야촌 등 6개의 구릉마을로부터 서라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아마 로마가 테베레 강을 통해 지중해에 가깝고, 서라벌이 형산강을 통해 동해에 가까웠던 것은 고대생활에 가장 중요했던 소금을 구하기가 쉬웠고, 고대 교역의 주요 상품이었던 수산물의 내륙이송 길목에 위치하였다는 것이 고대도시 성장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할 수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연대기록이 정확하다고 가정하고, 기원전 57년에 즉위하여 서기 4년에 죽은 박혁거세가 서라벌 땅을 다스리던 그 시기에 로마엔 누가 활약했을까하고 비교해보면 참 재미있는 동서양사 공부가 되기도 한다.

박혁거세왕이 즉위할 즈음인 기원전 60년부터 로마에선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크라수스에 의한 그 유명한 제1차 삼두정치가 시작되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8년전쟁(BC58-BC51)으로 갈리아(현재의 프랑스)지방을 로마의 속주로 만들었다.

박혁거세 재위시절에 로마에서 만들어진 유물 유적 중에 나에게 가장 인상이 깊은 것은 브루투스가 만든 로마 화폐 속에 있는 그림과 글자이다.

이집트를 거쳐 소아시아를 정복하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짧고도 유명한 말을 남겼으며, 현재 사용하는 그레고리달력 이전까지 사용되었던 율리우스 달력을 만들게 하기도 했던 로마 역사에 가장 유명한 영웅이자 신격화된 카이사르(시저)를 시해한 공화주의자 브루투스가 휘하의 병사들에게 봉급으로 주기위해 BC43-42년에 만들었다는 로마화폐 하나.

앞면에는 사람(브루투스)얼굴과 ‘Brut Imp(사령관 브루투스 란 뜻)’와 ‘L. Plaet. Cest(화폐 주조자 Lucius Plaetorius Cestius란 뜻)’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Eid Mar(3월 15일이란 뜻)’이란 글자가 있는데 이는 카이사르(시저)를 암살한기원전 44년 3월 15일을 기념하고, 두 개의 단도는 카이사르 암살용 칼을 뜻하고, 가운데 모자는 노예가 해방되었을 때 쓰는 것으로 참주인 카이사르의 암살로 다시 찾은 자유를 뜻한다고 한다.

더욱 푸른 소나무들 속에 오릉 옆 버드나무 가지에도 청록색 물감이 더욱 솟구치고 있었다. 그 아래 조용한 나무의자에 앉아 박혁거세왕이 이 땅을 다스리던 그 시절 저 멀리 로마에서 시저를 암살했던 브루투스가 부하들에게 주기위해 만들었다는 기념화폐를 떠올리면서 동서양 고대사를 흔들던 로마와 신라의 역사의 한 단면을 비교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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