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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충절의 상징 도이장가(悼二將歌)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4.22 17:06 수정 0000.00.00 00:00

향가

향가
충절의 상징 도이장가(悼二將歌)

황사가 잔뜩 머금은 봄을 숨 막히게 하더니만 지나가자, 이내 은행잎사귀가 조그만 애기 손 마냥 하늘을 향해 오물조물 한다. 환한 벚꽃 잔치에도 초대받지 못하다가, 비로소 기지개를 켜는 묵묵한 은행의 기다림이란 그래서 수백 년을 사는가 보다.
오늘 은행나무보다도 더 오랜 충절을 가진 두 장군이 있어 자신 있게 소개해 본다. 먼저 두 분의 장군을 추모한 향가(鄕歌) ‘도이장가’가 있어 함께 불러보기로 한다.

主乙完乎白乎
임금님을 구하여 내신
心聞際天及昆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매
魂是去賜矣中
넋은 갔지만
三烏賜敎職麻又欲
내려주신 벼슬이야 또 대단 했구나
望彌阿里刺
바라다보면 알 것이다.
及波可二功臣良
그 때의 두 공신이여
久乃直隱
이미 오래 되었으나
跡烏隱現乎賜丁
그 자취는 지금에 나타났도다.
<將節公遺事>

때는 고려 16대 임금 예종 15년(1120), 왕이 서경의 팔관회(八關會)에 참석했을 때였다. 허수아비 둘이 관복을 입고 말에 앉아 뜰을 뛰어다녔다. 왕이 이상히 여겨 물었더니, 좌우에 있던 신하들이 그 경위를 설명했다. 두 장군의 충절을 들은 예종은 즉시 향가 ‘悼二將歌(두 장군을 추모하는 노래)’를 지어 그들을 추모했다고 한다.

허수아비 둘은 신숭겸과 김락장군이다. 고려 태조 왕건(고려 태조 10년·927)이 후백제 견훤과 팔공산에서 싸우다가 포위되어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이때 체구가 비슷한 신숭겸은 왕의 어가(御駕)를 타고 싸우다가 김락장군과 함께 전사했다. 태조 왕건은 두 장군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 그의 시신을 거두어 광해주(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예장(禮葬)하고, 두 장군이 전사한 곳에 지묘사(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를 세워 명복을 빌게 하였다고 한다. 이때 장절공 신숭겸의 몸은 머리가 없어진 후였다. 이에 왕건은 순금으로 머리를 만들게 하여 장례를 지냈다. 그러나 왕건은 걱정이었다. 금두상이 무덤 속에 있는 것을 아는 자들이 혹시 도굴이라도 하는 날엔, 자신을 위해 목숨을 초계같이 바친 신숭겸에게 예의가 아닌 것이었다. 고심하던 왕건은 묘를 일단, 춘천과 팔공산 그리고 구월산 등 세 곳에 만들라고 했다. 또한 춘천에 묘를 만들면서 역시 봉분을 세 개 만들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르게 하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춘천에 있는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묘는 봉분이 세 개인 것이라고 한다.

왕 또는 주군을 위해 대신 관복을 바꿔 입고 목숨을 바친 사람이 역사상 여러 명 나타난다. 신라시대의 김춘추 역시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다가, 고구려왕에게 붙잡히는 신세가 되자, 고구려 신하 선도해의 ‘토끼의 간’ 이야기를 듣고 탈출하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도중에 고구려 순라군에 들켜 위기일발의 순간이었다. 이때 온군해가 춘추와 옷을 바꿔 입고, 그를 탈출시켰다. 이것을 우리는 기신(紀信)의 계책(한고조가 하남성 영양에서 항우의 군사에게 포위되었을 때, 기신은 고조의 수례를 타고 초군을 속여, 마침내 고조를 대신하여 죽었다. 이를 두고 한 말이다.)이라고 한다.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아름다운 충절은 항상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膾炙)되곤 한다. 박제상도 조금은 다른 방법이었지만 왕의 동생을 왜국에서 탈출시키고 죽었다. 한 번 죽음으로서 영원히 사는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예종이 지은 ‘도이장가’는 향가라는 천년신라의 노래가 마지막으로 달려가는 시점이었다. 학자들은 이를 쇠잔기(衰殘期) 향가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냥 고려가요라고 하기도 한다.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던 향가의 명맥이 고려 중기까지도 생명력을 유지하였다는 것은 여러모로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연이어 나타나는 문학 갈래인 시조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시조는 지금도 창작되고, 읊어 지는 문학이므로 향가의 잔영이 아직도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하겠다.

올 봄도 또 이렇게 한 페이지 달력마냥 지나가는가 보다. 마음은 향가의 발자취를 찾아 바삐 움직이지만, 아직까지도 향가 유적 찾기는 꼼짝을 하지 않는다. 요즘 그 흔한 1인 시위라도 해야 할까? 가슴이 아직도 답답함을 넘어서 고통에 가까워져 온다. 그래도 기다리자, 기다림이 또 다른 다가서기라고 하지 않던가.

박 진 환 프리랜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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