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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김부대왕 형제산 잘라 형산강 동해로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5.06 18:17 수정 0000.00.00 00:00

영남제일 부조장의 부조로 더 알려져

강동면 국당1리(菊堂一里)

↑↑ 고인돌
ⓒ 경주신문사

형산강(兄山江), 서라벌의 넓은 들판을 굽이굽이 흐르면서 알토란같은 자양분을 공급해온 경주의 젖줄이다. 찬란했던 신라천년의 문화와 역사를 뒷받침해온 어머니와도 같은 이 강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에는 형산강이 지금처럼 동해로 흘러들지 못했다고 한다. 경주와 포항의 경계지점에 있는 형제산에 가로막혀 지금의 강동지역 일대에서 큰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비만 오면 이 일대가 물에 잠기어 백성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호수에 큰 용이 나타나 동쪽에 막혀 있던 형제산을 꼬리로 내려쳤다. 그러자 산이 갈라지고 물길이 열리면서 호수의 물은 동해로 빠져나가고, 안강평야를 비롯한 인근의 넓은 들은 모두 옥토로 변하였다고 한다. 이때 용꼬리에 잘린 형제산은 그 이후 남쪽은 ‘형산(兄山)’이 되고, 북쪽은 ‘제산(弟山)’이 되었으며, 잘록하게 산이 잘린 곳을 ‘형산목’이라고 했다. 그리고 용은 김부대왕(신라 제56대 경순왕)이 죽어 신룡(神龍)이 되어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 준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김부대왕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신당을 지어 제를 올렸다고 한다. 김부대왕에 대한 신앙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강동면 국당리의 형산 정상부에 있는 왕룡사(王龍寺 옛 옥련사)에는 보통 절에서 보기 어려운 용왕전이 마련되어 있고, 현재 이곳에는 김부대왕과 그 신위가 모셔져 있다.

김부대왕 신당과 국화로 국당(菊堂)

국당(菊堂)은 형산강의 전설이 얽힌 ‘형산’과 ‘형산목’이 있는 마을이다. 국도 7호선을 따라 경주에서 포항으로 가다가 강동대교를 지나 강동면사무소가 있는 유금리에서 동쪽으로 바라보면 형산과 제산 사이로 형산강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오른쪽(남쪽) 형산을 의지하여 자리한 마을이 국당이다. 형제산을 잘라 물길을 내고 옥토로 만들어준 고마운 김부대왕을 모시던 신당이 있었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마을에 국화재배가 잘 된다고 하여 ‘국당(菊堂)’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마을은 조선말 전국 4대 장의 하나로 꼽히던 ‘부조장(푸조장)’이 있었던 곳으로 일반에는 ‘부조’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부조·중명을 국당1리, 국당·안마을을 국당2리, 범골·샛마을·가막골·황새말을 국당3리로 구분하고 있다.

1924년까지 강동면 소재지

국당1리는 부조와 중명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형산을 사이에 두고 서쪽기슭은 부조마을이 자리하고 있고, 동쪽기슭에는 중명마을이 있다. 부조는 영남의 제일장으로 배가 이곳까지 들어와 소금과 어판장이 활성화되어 있던 부조장이 있던 곳이다. 일제시대인 1924년까지 강동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이곳에 있었을 만큼 강동의 중심이었다.

현재 부조는 옛날에 비하면 많이 쇠락해 있다. 본래 형산강이 지금보다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고, 서쪽의 유금보다 동편의 국당이 오히려 땅이 넓었다고 한다. 제방을 새로 하면서 동쪽으로 물길이 옮겨져 서쪽은 넓어진 반면 이 마을은 강과 산 사이의 거리가 지금처럼 아주 좁아진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시장도 포항으로 옮겨가고, 면사무소도 유금으로 옮겼다.

이 마을은 옛날 영남제일의 장이 섰던 상업의 중심이었고, 면소재지와 주재소가 있던 행정의 중심이었던 옛 영화는 간데없고 평범한 전원마을로 전락해 있다. 그러나 마을 인심은 살아있고, 주민화합과 협력이 잘 된다고 한다.

이 마을은 논농사 외엔 특별한 작물이 없다. 마을주민 대부분이 고령자들이고 최근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에는 젊은 사람들이 있다. 마을전체에 젖먹이, 유치원생, 초등생이 각1명씩만 있다고 한다.

이 마을 최고령자는 김출이(83 중곡댁)할머니로 바깥출입이 자유롭고 농사일을 할 정도로 아주 건강하시다.

당목 및 동제 이 마을은 오래전부터 절(왕룡사)에서 제를 지내기 때문에 당수나무와 제당이 없다고 한다.

경주 중명과 포항 중명 한마을에

↑↑ 대웅전
ⓒ 경주신문사

부조(扶助) 조선시대에는 형산강을 거슬러 배가 이곳까지 들어와 동해에서 들어오는 각종 해산물을 이곳 푸조장에서 내륙지방 각처에 공급하는 영남제일의 시장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마을이름도 ‘푸조’, ‘부지’, ‘웃부조’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다시 장테와 대추밭각단으로 세분된다. 장테는 장이 있었던 곳으로 부조의 북쪽을 말한다. 대추밭각단은 부조마을의 다른 이름으로 대추밭이 있었던 곳에 마을이 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924년까지 면사무소와 주재소(지서)가 이곳에 있었다. (47가구)

장테 부조장터 부근에 있는 마을로 부조 서북쪽이 된다.
대추밭 부조마을로, 대추나무가 많이 있다. ‘대추밭각단’이라고 부른다.
중명(中明) 중명은 형산 동쪽기슭에 자리한 마을로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도랑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경주 중명, 동쪽은 포항 중명으로 갈렸다. 본래 이 마을은 포항에 들어가야 하는데 당시 세도가였던 이 마을 서산류씨(瑞山柳氏)들이 경주에 편입되도록 힘을 써 이렇게 경계가 지어졌다고 한다.

서산류씨(瑞山柳氏)의 집성촌으로 항상 밝음 속에 사는 마을이라 하여 ‘중명’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포항시 남구 연일읍 중명리(延日邑 中明里)와 도랑을 사이에 두고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35가구)

문무왕 때 쌓은 돌성

↑↑ 성벽
ⓒ 경주신문사

형산(兄山) 높이 256m의 부조 동쪽 산. 신라 때에는 북형산(北兄山)이라 하여 중사(中祠)로 제사를 지냈는데, 문무왕 때 쌓은 석성(石城)이 있다. 이 산은 모양이 마치 연꽃처럼 생겼다고 하여 혹은 ‘연화봉(蓮花峰)’이라고도 한다.

형산성(兄山城) 터 국당리 형산 정상에 있는 돌로 쌓은 성으로 길이가 약 720m 정도이다. 신라문무왕 13년(673) 9월에 말갈, 거란과 동해를 통해 침입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축조하였다. 현재 건물자리와 성문자리가 남아 있고, 봉수대와 연못이 남아 있다. ‘북형산성(北兄山城)’이라고도 한다. 봉수대가 있는 정상부에 성곽일부가 남아있다.

형산봉수(兄山烽燧) 형산 정상에 있는 봉수대로 ‘봉우재’, ‘봉오재’, ‘봉화재’라고도 부른다. 동쪽으로는 영일현(迎日縣) 사화랑산봉수, 서쪽으로는 영천 소산봉수(所山烽燧)에 연기를 피워 신호로 알리던 곳이다.

왕룡사(王龍寺) 1910년경에 중건된 형산 정상부에 있는 절이다. 김부대왕을 모신 용왕전이 있다. 이 용왕전에는 문인상과 무인상의 목상 2기가 중앙단에 주불처럼 모셔져 있다. 용왕전은 15년 전에 중건했으며, 대웅전은 재작년에 크게 새로 지어 아직 단층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김부대왕 사당(金傅大王祠堂) 터 국당리 산2번지, 형산 연화봉(蓮花峰) 동쪽 돌병풍 아래 큰 반석 앞에 김부대왕을 모시던 곳이 있었는데 지금의 왕룡사(王龍寺) 안으로 옮겼다.

목조 문무인상(木造文武人像) 왕룡사(王龍寺)에 있는 목조 문·무인상으로 약 200년 전에 회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 목상은 김부대왕을 형상화 한 것이라고 한다. 경순왕의 이름이 김부이기 때문에 김부대왕은 경순왕으로 보는 견해가 많으나 마의태자로 보는 학자도 있다. 그리고 형제산을 잘라 물길을 낸 용은 마의태자가 기도를 통해 화한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그리고 이 2기의 목상은 경순왕과 마의태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통나무를 깎아서 만든 이 두 목상은 동쪽에는 문인상, 서쪽은 무인상을 배치했다. 둘 다 왼손만 드러나게 조각했고, 오른손은 옷속에 감추어진 형식을 취하였다. 오른쪽에 있는 문인상은 왼손으로 턱수염을 잡고 큰 관모를 쓰고 있으며, 푸른 옷에 얼굴은 살색으로 칠해져 있다. 무인상은 투구를 쓰고 왼손에 무엇을 바쳐든 것 같은 형태이며 역시 푸른 옷에 얼굴색은 붉은 색으로 칠해져 있다. 도지정 민속자료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 서산류씨들이 물알(포항)사람들이 이곳에서 공을 들여 고기도 잘 잡히고 영험이 있다고 출입이 잦아지자 보기 싫다고 목상을 뽑아 물에 쳐 넣었는데 이후 류씨들의 소년죽음이 많아 새로 목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경순왕과 마의태자 목상

↑↑ 부처
ⓒ 경주신문사

부조장(扶助場) 터 형산목이 있는 곳. 즉 형산의 북쪽기슭인 형산강 남쪽 언덕배기에 동해를 드나드는 어선과 선박들의 나루터가 있고, 영남제일의 ‘푸조장(푸지장)’이 있었다. 이곳에서 해산물을 비롯한 각종 물품들이 경주·영천·대구 ·의성·안동·청송 등으로 육로를 통해 수송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강바닥이 점점 높아져 배가 드나들 수 없게 되고, 장터가 일시 인동리로 옮겼다가 드디어 장을 폐지하게 되었다. 19세기 들어오면서 부조장(扶助場)으로 불렀다. 혹은 연화봉 아래가 되므로 ‘연화장(蓮花場)’이라고도 한다.

부조 나루터 조선시대 동해 지방에서 생산되는 해산물을 내륙지방으로 공급하던 나루터로, 부조 북쪽에 있다. ‘부조진(扶助津) 터’라고도 한다.

온지연(溫之淵) 왕신천(旺信川)이 형산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부터 형산목까지를 ‘온지연’이라고 한다. 이곳은 옛날 깊은 강연(江淵)으로 기우소(祈雨所)가 있었던 곳이다.

연화봉(蓮花峰) 왕룡사(王龍寺) 동쪽 봉우리에는 큰 바위들이 모여 있는 모양이 마치 연꽃을 엎어 놓은 것 같다고 하여 ‘연화봉’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오르면 포항시가지와 포항산업단지, 동해가 한 눈에 들어온다.
형산목 ‘형산(兄山)미기’ ‘형산항(兄山項)’, ‘양산(兩山)메기’라고도 부르는데, 강을 마주하여 남북으로 형산(兄山)과 제산(弟山)이 마주 있다. 원래 형산과 제산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산이 아니라 하나의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용꼬리에 산이 잘려 지금처럼 양산 사이에 목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지금은 제산을 뚫어 유강터널을 통해 포항으로 가지만 예전에는 국도7호선이 형산목 옆의 좁은 난간과 형산강에 다리를 놓아 길을 만들어 형산목을 돌아 다녔다. 이곳이 병목처럼 좁아 홍수가 지면 상류인 안강지역이 침수되기도 한다.
형산포(兄山浦) 부조 북쪽 형산 강가에 있던 포구로, 형상포구(兄山浦口)라고도 불렀다.

등잔바위 강에 쳐 넣어

↑↑ 조각상
ⓒ 경주신문사

면솟갓 장승리 남쪽에 있는 강동면사무소 소유였다고 하는 산으로 형산의 서쪽 자락인 부조마을 뒷산이다. 본래 아산장씨들의 문중산이었는데 일제 때 가난해 나무를 못 심어 면소유로 넘어갔다고 한다.
갓등 부조 남쪽에 있는 등성이로, ‘새갓등’이라고도 한다.
갓등짤루기 갓등 위에 있는 고개로, 지형이 잘록하다.
벼락골 옛날에 벼락을 쳐서 산이 무너졌다고 한다. 장승배기 동남쪽 골짜기이다.
장골 부조 서남쪽의 골짜기로, 장이 있었으므로 장골이라고 한다.
큰골 대추밭 동남쪽에 있는 큰 골짜기.
대밭골 부조 북쪽의 골짜기로, 대나무밭이 있었다. 지금도 신이대가 많이 있다.

장터 윗골짜기로 마을주민들은 ‘장테골’이라고 부른다.

돈태구디이 갓등 짤루기 동쪽에 있는 골짜기에 움푹하게 파인 구덩이처럼 생긴 곳, 부조장으로 가던 장꾼들이 돈치기를 하면서 놀았다고 한다.

↑↑ 바위
ⓒ 경주신문사

등잔바우 장승배기 서남쪽에 있는 바위로, 위가 등잔처럼 넓적하게 생겼다. 길을 내는데 가운데 있어 새마을사업하면서 강에 밀어 넣었다. 강에 밀어 넣은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한다.

장승배기 부조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골짜기 어귀에 장승이 서 있었다고 한다. 또 장이 이곳에 옮겨 섰다고하여 ‘장선배기’라고도 한다.
기와집도가리 옛날 기와집 소유였던 논으로, 부조 서남쪽에 있다.
중명저수지(中明貯水池) 중명 남쪽에 있는 저수지로 일제 때 막았다고 한다.

마을침수 잦아 배수시설 갖추어야

부조는 마을이 형산강 제방보다 낮아 비가 많이 오고 강물이 높아지면 마을 물이 강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을에 물이 찬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모두 마을에 고여 마을이 물바다가 된다. 대형펌프시설을 설치해 물을 강제 배수시켜야한다. 지금도 비만 오면 마을 안길이 물에 잠겨 주민들의 통행이 어렵다고 한다.

 
↑↑ 면사무소터
ⓒ 경주신문사 

마을이장과 부녀회장 등 젊은 사람들은 모두 일 나가고 없고, 노인회장을 비롯한 어른들이 취재진을 맞았다. 김준수 노인회장님은 연로하신 데에도 불구하고 형산 꼭대기에 있는 봉수대와 성곽, 연화봉 등을 직접 안내해 주셨다. 왕룡사 대중공양간에서 먹은 비빔밥은 담백하면서도 정말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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