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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효명세자’와 ‘불령봉표’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5.06 18:18 수정 0000.00.00 00:00

문화재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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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신문사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효명세자’와 ‘불령봉표’

지난 4월 15일 경주학연구원 역사기행 ‘만파식적의 길’ 일명 ‘문무왕 장례길’ 답사 중 보덕동 추원마을에서 계곡을 타고 고개를 넘는 모차길은 정말 상쾌하고 아름다운 추억의 시간이었다.

특히 점심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걸음으로 고개를 넘다가 만난 ‘불령봉표’는 비록 신라시대 문무왕 신문왕의 역사흔적을 답사하는 만파식적의 길과는 약 1천200여년의 시차를 가지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며,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라 불리는 효명세자가 죽은 다음해인 신묘년(1831년)에 그의 묘에 사용할 제수에 필요한 경비를 기림사 일원의 산으로 정해 이 부근의 산에서 나오는 묵탄을 생산해 충당한 것을 기록하는 소중한 문자기록유물이다.

이 때 해당지역에 대해 일반인들의 출입과 벌목을 금지하기 위한 봉금정책을 실시함과 이를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세운 것인데, 현재 ‘불령봉표’와 ‘시령봉표’가 발견됐다.

모차골 산길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불령봉표에는 ‘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 즉 “연경의 묘에 쓸 향탄 즉 목탄을 생산하기 위한 산이므로 일반백성들이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임금의 명을 받아 불령에 봉표를 세운다” 뜻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연경’은 조선왕조 제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인 효명세자의 묘호이고 이름은 영, 자는 덕인, 호는 경헌이였다.

효명세자의 묘는 처음엔 서울 석관동 천장산 의릉(경종의 릉) 왼쪽에 안장되었으나, 그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익종으로 추존되고 수릉으로 승격하였고, 풍수상 이유로 양주 용마봉으로 이장되었다가, 다시 철종6년(1855년)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건원릉 왼쪽에 옮겨져 오늘날 동구릉이 불리는 왕릉군의 마지막 왕릉이 됐다.

동구릉은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을 비롯하여 현릉(5대 문종과 현덕왕후), 목릉(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휘릉(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숭릉(18대 현종과 명성왕후), 혜릉(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원릉(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수릉(23대 순조의 세자인 추존왕 익종과 비 신정왕후), 경릉(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등 아홉 개의 능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처음엔 ‘동오릉’또는 ‘동칠릉’이라 불리다가 1855년 철종때 양주에 있던 효명세자의 수릉이 이곳으로 이장되면서 아홉 개의 능이되어 ‘동구릉(東九陵)라 불리게 되었다.

불령봉표의 주인공 효명세자는 당시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 세력의 세도에 눌려 허수아비 왕노릇을 하던 순조가 비장의 카드로 선택을 하여 19살인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실질적인 왕권을 행사시킨 조선왕조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순조의 깊은 정치적인 뜻을 이어받은 효명세자는 김재찬을 기용하여 당시 세도가 안동김씨 세력을 철저히 견제하였으며, 역대 국왕 중에서 가장 예술적 문학적 조예가 깊고 뛰어 났으며 무엇보다도 춤을 사랑한 왕이었다.

아버지 순조의 정치적 염원과 기대를 한 몸에 지고 부왕의 명을 받들어 대리청정 (순조27년 2월 18일부터 순조 30년 5월 6일까지) 기간동안 탁월한 정치적 역량을 증명해 보였으나 갑작스런 의문의 급사를 하게된다.

비록 3년 3개월이라는 짧은 통치기간에도 불구하고 전례없이 황제식 궁중연향들을 벌이면서 궁중 무용의 창사와 가사를 직접 짓고 연행에 쓰이는 치사와 전문을 직접 지어 올리고 이름만 남은 옛 정재(궁중무용)들을 자신의 악장으로 되살려내고 연행의 규모를 확대하여 조선왕실의 위엄을 한껏 드러내는 화려한 정재와 연향의 양식을 확립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 3년여의 짧은 시기를 통해 조선왕조의 궁중 정재(궁중무용)의 수준을 정점으로 끌어올려 왕궁문화의 꽃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조선조 궁중 정재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조선말까지 전해진 53종의 조선왕조 궁중정재 중 26종의 정재를 직접 예제하고 재창작한 분이 바로 효명세자였다.

조선왕조 후기 정재(궁중무용)의 황금기를 이룬 공로로 효명세자는 2005년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11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삼국통일을 이룩했던 문무왕의 장례길이자 만파식적의 길이기도 한 모차골 산길에서 만난 불령봉표에 새겨진 ‘延慶墓 香炭山因 啓下 佛嶺封標’ 명문 중 ‘延慶’이라는 두 글자 묘호가 의미하는 효명세자에 얽힌 역사산책을 하다보면 정말 무궁무진한 조선후기의 파란 만장한 역사가 샘솟는다. 정조의 죽음- 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순조즉위와 벽파집권- 김조순등 안동김씨 득세- 효명세자 대리청정시작과 안동김씨 퇴진- 효명세자 급사와 신정왕후와 풍양조씨의 득세- 조선후기의 혼탁한 정치적 상황 전개 등등.

사가들은 말한다. 효명세자가 급사하지만 않았어도 조선왕조는 그렇게 허망하게 몰락의 길을 걷지는 않았을 거라고... 조선왕조의 마지막 희망으로 불리던 효명세자가 죽은 후 묘에 제물비용을 위해 천리길 기림사 일대산이 정해진 자세한 사연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조그만 바윗돌 하나에 새겨진 몇 글자에 포함된 깊고 깊은 조선후기의 역사의 풍랑은 모차골 문화답사의 매력을 한층 더 높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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