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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사회종합

‘삼국사기’에 묻노라-上

이채근 기자 입력 2007.05.06 18:21 수정 0000.00.00 00:00

향가

향가

‘삼국사기’에 묻노라-上

비가 온다. 비님이 온 누리를 큰 가슴으로 품는다. 푸름이 흠뻑 물을 들이켜 수액 오르는 소리가 심장 고동 소리보다 더 크게 마음을 희망지게 한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고 어느 시인은 찬란하여서 서러운 詩想(시상)을 마음껏 노래했다.

‘서러운 풀빛’은 어떤 색감일까? 봄비에 놀란 연두 빛깔이 심상 저 밑바닥을 서럽게 요동치게 하는 것일까? 역시 시인의 육성은 세상을 한 번 더 굴절하여, 자신의 내공에서 오래도록 묵히고 묵혀 힘껏 내뱉는 고통의 소리인가 보다.

우리는 ‘삼국사기’라는 우리 고대사를 기록한 귀중한 문화재를 보물로 알고 있다. 사실이다. 기전체(紀傳體)로 편찬된 이 책은 김부식과 정습명 등 9명이 관찬(官撰) 정사(正史)를 표방하면서 고려 인종 23년(1145)에 50권으로 간행됐다. 그동안 사대주의 역사관을 가졌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일정부분 옳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분에 사대의 흔적이 나타난다고 해서 전체를 오도하는 우를 범하면 되지 않는다고 하겠다.

먼저 비판받는 부분을 대별해보면, 첫째, 가야를 제외시키고 삼국만 다루어서 우리 역사를 축소한 것이라고 문제 삼는다. 그러나 전체를 읽어보면 가야의 왕이 5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금관가야의 수로왕과 구형왕, 그리고 대가야의 도설지왕, 가실왕, 아진아시왕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혼인, 전쟁 등 곳곳에 가야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신라의 사국 통일 후 북국이라고 표현한 발해와도 선린외교 기사가 보인다. 책 이름에서 선입감을 가지고 보니까 그런 것 같다.

둘째, 북위로부터 수, 당나라에 일 년에도 여러 차례 조공사절단을 파견했다는 것을 보면 사대주의 역사관으로 집필되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국과 육지로 연결된 나라치고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지 않은 나라가 이 지구상에 있는가. 그리고 사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와의 선린에 중점을 두지 않고 1만년의 역사를 영위할 수 있을까. 강하게 되받아쳐 나라가 없어지면 그때 역사니 민족이니 말 할 수가 있을까. 사실 중국은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고 있는 다민족 국가이다. 역사상 수많은 민족들이 결국은 한족에 동화되어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他山之石(타산지석)으로 보고 있다. 물론 중국에 사대하면서 살자는 이야기는 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현재 동맹이니 우방이니 하면서 대국의 틈바구니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사대라는 놈에게 정말 자유로운 것인가.

셋째, 왕의 죽음을 천자의 죽음인 ‘붕(崩)’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제후격인 ‘훙(薨)’으로 적은 것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고구려 본기를 보면, 시조 주몽(동명성왕)은 ‘승하(升遐)’라고 표현되어 있다. ‘승하’는 ‘붕’과 같은 격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장황하게 ‘삼국사기’의 편찬 성격과 비판을 살펴보는 이유는 사실은 다른 데 있다. 사국을 삼국이라는 부분과 사대주의 역사관 등은 비판하면서 정작 묻고 싶은 곳은 그냥 지나친다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고, 화랑과 향가에 관한 부분이다. 김부식은 화랑이라는 제도를 분명히 알고 있었다. ‘화랑세기’를 인용하면서 ‘현좌(賢佐)와 충신(忠臣)이 이로부터 솟아나고 양장(良將)과 용졸(勇卒)이 이로 말미암아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본기와 열전을 보면 겨우 그 출신을 알 정도의 지식밖에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향가는 그 곡명만 여러 개 기록하였지 단 한곡도 노랫말이 기록된 것이 없다. 물론 유가(儒家)들은 ‘괴력난신(怪力亂神) 사리부재(詞俚不載)’를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화랑과 향가에 인색한 이유가 이것이란 말인가. 왜 화랑과 향가가 괴력난신(괴이한 폭력이나 어지러운 잡귀신)이란 말인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함께 하나씩 풀어 가보도록 하자.

김부식은 신라 황족 후예이다. 그의 가계를 보면, 그는 무열왕계의 후손으로 이해되고 있다. 신라 56대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바치자, 고려 태조는 경순왕 김부를 경주 사심관으로 임명했다. 이때 김부식의 증조부인 김위영이 경주 주장(州長)이라는 향리직의 우두머리에 임용됐다고 한다. 할아버지 역시 경주 향리직에 종사하다가, 아버지 김근(金覲)대부터 중앙정계로 진출했다. 그의 아버지 김근은 예부시랑, 좌간의대부(5품)에 올랐고,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돌아왔으나, 장년에 죽었기 때문에 고관에 오르지는 못했다고 한다.

특이한 것은 김부식 형제 4명이 모두 과거를 거쳐 고관이 되었다는 것이다. 맏형 부필은 선종 5년(1088)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둘째 부일(1071~1132), 동생 부철(?~1136:후에 부일로 개명) 역시 과거에 급제하였다. 고려에서는 국법으로 아들 3형제를 과거에 합격시킨 어머니에게는 매년 30석의 곡식을 내려주는 제도가 있었다. 김부식의 어머니는 4형제를 급제시킨 것으로 국왕이 매년 40석의 곡식을 내려 주었다고 한다. 더불어 예종은 세 아들을 한림으로 두었다고 하여 특별포상을 하려고 했으나, 김부식의 어머니는 이미 받은 포상도 지나친 것이라고 간곡하게 사양하였다고 한다. 그 자식의 그 어머니인 것이다.

이런 가문에서 자란 김부식은 황족의 후손이라는 커다란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라벌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또한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부식은 천년황도 서라벌을 훤하게 꿰뚫고 있었으면서, 왜 그 정신적 지주였던 화랑과 향가를 밝혀 적지 않았을까?

박 진 환 프리랜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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